책이야기

최재봉의 탐문 _12 유토피아 .. 천국과 지옥 사이, 유토피아

닭털주 2022. 4. 9. 18:11

천국과 지옥 사이, 유토피아

 

최재봉의 탐문 _12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낸 <유토피아>모어 자신이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라는 인물을 만나 그가 경험한 이상 국가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히슬로다에우스는 그리스어로 허튼소리를 퍼뜨리는 사람으로 풀이되며,

그 점은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하는 유토피아와 함께 이 책의 내용이 한갓 공상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도스토옙스키의 말년 단편 우스운 인간의 꿈’(1877)의 주인공인 화자는 어느 날 꿈속에서 지구를 벗어나 외계 행성으로 여행을 한다. 지구를 빼닮은 그 행성에서 사람들은 음식과 옷을 얻기 위해 아주 가볍게 조금씩만 일했, 사람들 사이에는 다툼도 질시도 없었. 신앙이 없었음에도 절대자와의 긴밀하고도 생생하며 지속적인 일체감이 있었, “학문 없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인류가 죄를 짓기 전에 살았던 잃어버린 낙원의 모습을 지닌 이 행성은 그러나 병균과도 같은 주인공의 도착과 함께 서서히 타락해서 결국은 지구와 다르지 않은 죄악과 고통의 땅으로 바뀌고 만다.

 

꿈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꿈에서 자신이 보고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한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무엇인가. ‘삶에 대한 인식은 삶 자체보다 우위에 있고, 행복의 법칙에 대한 지식은 행복 자체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상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학문과 사상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이 먼저라는 이런 생각은 공상적 사회주의로부터 기독교적 사랑으로 나아간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세계관의 궤적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그의 마지막 대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제로도 이어진다.

작가 자신은 이 작품을 환상적인 이야기로 분류했고, 외계 행성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초보적인 에스에프(SF)로 볼 수도 있겠다. 그와 함께, 낙원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유토피아 서사의 일종으로 이 소설을 읽는 독법이 가능하다.

유토피아 문학의 기원은 물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영국의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모어가 1516년에 낸 이 책은 모어 자신이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라는 인물을 만나 그가 경험한 이상 국가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히슬로다에우스는 그리스어로 허튼소리를 퍼뜨리는 사람으로 풀이되며, 그 점은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하는 유토피아와 함께 이 책의 내용이 한갓 공상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책에서 모어는 라파엘의 주장에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등장인물 모어의 발언과 생각이 곧 지은이인 모어 자신의 것이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모어가 라파엘의 불온한주장에 자신은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가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라파엘이 소개하는 이상국 유토피아의 핵심은 화폐와 사유재산의 폐지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불안해하고 다수는 완전히 비참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라파엘의 주장에 소설 속 인물 모어는 하지만 저는 의견이 다릅니다라며 맞선다.

내 생각에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잘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일을 안 하려고 할 텐데 어떻게 물자가 풍부하겠습니까? 이익을 얻을 희망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려 하고 게을러질 것입니다.”

라파엘과 모어의 논쟁은 사유재산을 둘러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기본적인 견해 차이를 대변한다. 라파엘이 들려주는 유토피아 이야기를 들은 모어는 그가 설명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하게 보였다며 특히 화폐가 없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일반적으로 국가의 진정한 영광으로 여기는 귀족성, 장엄함, 화려함 및 장대함이 사라질 것이라며 의구심을 표한다. 그러나 유토피아 공화국에는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으면 좋겠다고 염원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고 본다는 책의 마지막 문장은 유토피아에 관한 모어의 진의를 놓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게 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유토피아>에서 출발한 유토피아 문학은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1602),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

볼테르의 <캉디드>(1759),

에드워드 벨러미의 <뒤를 돌아보며>(1888),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1891) 등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작가와 작품마다 강조점이 다르고 책에 묘사된 유토피아의 모습도 제각각이지만,

과학기술 발전이 약속하는 이상 사회의 전망과 그에 배치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유토피아 문학의 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유재산제의 폐지라는 <유토피아>의 핵심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현실이 된 뒤, 유토피아 문학에는 커다란 전기가 찾아온다.

유토피아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킨 디스토피아 문학이 일대 유행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1949)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앞서 오웰의 이튼 칼리지 스승이었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가 있었고,

다시 그 이전에 혁명의 본고장 소련에서 나온 예브게니 자먀틴의 <우리들>(1920)이 있었다. <우리들><멋진 신세계><1984>에 영향과 자극을 준 디스토피아 소설의 모델과도 같은 작품이다.

<우리들> <멋진 신세계> <1984>에 그려진 세계는 고도의 감시와 통제, 획일화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우리들><1984>에서는 남성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을 만나면서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하며, 고문과 세뇌, 뇌 수술 등을 거치면서 이전보다 더 확고한 체제의 일부로 거듭나게 된다.

이 두 소설에서 자유행복이 대립적 가치로 묘사되고 주인공이 결국 무뇌아적 행복에 안착한다는 사실 역시 공통적이다.

<멋진 신세계>를 포함해 세 소설 모두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요소로 사랑을 든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욕망과 쾌락을 금기시하든(<우리들> <1984>) 장려하든(<멋진 신세계>) 그것들과는 구분되는 감정으로서 사랑은 최첨단 과학기술과 고도의 정치적 통제로도 어찌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작가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제임스 힐턴이 1933년에 발표한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도 유토피아 문학에 해당하지만 디스토피아 소설들과는 다른 결을 지닌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콘웨이를 비롯한 일행은 비행기 불시착으로 티베트 산악 지대의 라마교 사원 공동체 샹그릴라에 도착한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그곳은 다소 모호한 형태의 신정(神政)에 의해 지배되는곳으로, 물자와 식량이 풍부하며 구성원들은 바깥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긴 수명을 누린다. 동양적 중용과 무위를 핵심적 가치로 삼는 이 세계는 중국 시인 도연명이 노래한 무릉도원을 떠올리게도 한다.

서로 알려서 농사 힘쓰고/ 해 지면 쉴 곳으로 돌아가네/ 뽕과 대나무 넉넉한 그늘 드리우고/ 콩과 기장 때맞춰 심는다네/ 봄에는 누에 쳐서 긴 실을 뽑고/ 가을에 벼 익어도 세금이 없네/ () / 비록 세월 적은 달력 없지만/ 사철 절로 한 해 이루나니/ 편안하고 넉넉한 즐거움 있는데/ 어찌 수고로이 꾀를 쓰겠는가”(도연명, ‘도화원기부분)

한국 소설로 유토피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이청준의 장편 <당신들의 천국>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한센병 환자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를 무대로 삼은 이 소설은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한 조백헌 대령이 나름의 선의로써 그곳에 건설하고자 하는 천국의 본질을 따져 묻는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에 소설의 문제의식이 집약되어 있는데, 한센병 환자들 자신의 자유와 사랑이 배제된 바깥으로부터의 인위적 천국이란 말의 바른 의미에서 천국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76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박정희식 근대화에 대한 알레고리적 비판임과 동시에 지배와 피지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관계 같은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을 분석한 평론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를 비롯해 이청준에 관한 글 세 편이 실린 김현의 평론집 <문학과 유토피아: 공감의 비평>5·18 광주학살 직전인 19805월에 출간되었다. 초판 출간 42년 뒤에 책을 다시 들춰보자니 서문의 마지막 문장이 새삼 사무친다.

어두운 시절을 보내고, 새 시대를 바라다보고 있어도 글쓰기는 더욱더 어렵기만 하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