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소설가보다 똑똑한 소설

닭털주 2022. 5. 13. 10:34

소설가보다 똑똑한 소설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번역은 기존 텍스트를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그 텍스트 또는 저자와 어떤 관계를 설정하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나로서는 저자에게 질질 끌려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자의 텍스트를 장악하고 싶지도 않다.

어느 한쪽의 색으로 상대를 칠해버리려 하기보다는 서로 색깔을 유지하면서 두 색깔이 만나며 서로 번져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낼 여지를 주는 게 매력 있다.

박서련 단편의 표현을 빌리면, “몸을 전혀 맞대지 않고도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사이즈”(‘A Queen Sized Hole’)를 찾는 게 중요하다.

 

창작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나는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와 작중 인물의 관계를 눈여겨보는 쪽이다.

가령 소설 속 인물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작가의 언어나 어휘를 전달하는 느낌이 들 때면 거슬린다.

인물이란 작가의 분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신도 자기 피조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판에 작가인들 자기 창조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모든 진정한 소설가는 개인을 넘어서는 그 지혜를 찾아 귀를 기울이고, 그래서 훌륭한 소설은 늘 그것을 쓴 사람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 자기 소설보다 똑똑한 소설가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밀란 쿤데라가 한 말인데, 소설가는 이 지혜를 어디서 찾을까?

첫번째 자원은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일 듯하다.

실제로 쿤데라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원래는 작가의 도덕관에 따라 비극적 종말을 맞이해 마땅한 인물로 설정되었는데 쓰다 보니 달라졌다는 예를 든다.

결국 톨스토이는 자기 도덕관으로 인물을 재단하기보다는

인물에게 겸허하게 귀를 기울였다는 뜻이다.

박서련의 단편에서 느껴지는 밝은 기운의 근원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 이야기에서 소설가 승희는 간신히 대출을 받아 전셋집으로 이사하면서 퀸사이즈 매트리스만큼 욕망의 면적을 넓히려 한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 잠깐 친하게 지냈던 리라를 오랜만에 만난다. 그는 그간 벌어진 사건 때문에 도저히 다시 친해지기는 힘든 상대다. 그러나 리라는 물이 스며들듯 승희의 생활로 스며들어 급기야 이사 간 집에서 같이 살고, 매트리스에 함께 눕는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작가와 승희가 소설가로서 리라를 내려다보지 않고 그에게 독자적 발언권을 주기 때문에, 또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소설가와 소설을 다시 자리매김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결과 두 사람이 고통 갈망 공간을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원래 일인용으로 샀던 퀸사이즈 매트리스에서 함께 이루어내는 평등은 놀랄 만큼 상쾌하다. 아마 두 사람에게 그것은 가끔찾아오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도 승희도 굳이 똑똑해지려 애쓰지 않는다.

승희는 리라를 굳이 내쫓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추론 과정은 나오지 않는다.

또 리라가 왜 집에 안 가는지를 모르고는 같이 지낼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순간 리라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다른 훌륭한 작품 기미에서 작가는 핵심적 대목에서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인지 원희는 모른다고 천연덕스럽게 서술한다.

그의 초기작 <체공녀 강주룡>에서도 우리는 강주룡이 목숨을 건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의외로 단순한 것에 놀란다.

사실 모른다는 박서련의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표현이다.

어떻게 쓴 사람이 모를 수가!

쓴 사람이 모르는 게 아니고 그 인물이 모르는 것이며, 작가는 내 설명이 아니라 똑똑한 소설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작가의 그릇이 인물과 함께 눕는 퀸사이즈라는 것,

리얼리즘이 승리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