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자유의 조건

닭털주 2022. 5. 13. 10:37

자유의 조건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영국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이는 심한 착각이다.

그들은 단지 선거일에만 자유로울 뿐이며, 다음날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

18세기 사상가 루소의 이 말은 선거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인용구일 것이다.

당사자인 영국인들은 이게 좀 재밌다고 느끼는지 지금도 선거일이면 이 인용구를 신문 1면에 크게 싣고는 한다. 이런 말을 붙여서.

자유로운 날이니 오늘 신문은 공짜(free)입니다!”

루소의 말은 <사회계약론>(1762)대의제라는 장에 나오는 것으로, 시민들이 주권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한 자유롭게 사는 건 꿈같은 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기억할 한 가지 사실은 루소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고, 시민들의 자치도시인 제네바 출신으로서 고향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제네바는 직접민주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1780년대에 대의제로 바뀐다.)

루소가 영국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긴다고 써서 마치 이것이 그들만의 의견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 것은 약간은 반칙이었다. 바다 건너 프랑스인들 역시 영국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믿음의 열렬함은 오히려 영국인들을 능가하는 감이 있었다.

루소의 영국관은 대세에 별로 맞지 않았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에는 영국을 행복의 낙원이라고 부르는 구절이 나온다.

영국의 자유는 그처럼 인상적이었다. 다만 영국인들이 자유를 획득한 비밀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 이르면, 자극적인 이야기는 의외로 찾기 어렵다. 볼테르는 그 비밀을 상업이라고 단정한다. 상업이 자유를 낳고, 자유가 다시 상업을 촉진했다는 것이다.(<철학 서한>, 1734) 몽테스키외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관용이나 절제를 찬양하기는 했지만 이런 미덕은 자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본 듯하다.

 

영국인을 자유롭게 한 정신적 조건을 탐구한 책으로 미국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의 <영국 국민성론>(1856)이 있다. 에머슨은 영국인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질로 용기’(pluck)를 든다. 이는 주교부터 마부까지 이 국민 모두가 가진 특질그들은 자기 생각을 그렇다 아니다로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을 싫어한다.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 그들은 당신을 불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둘 것이다.” 불법만 아니면 말이다. 내버려둔다는 일단 두고 보다가 나중에 거둬들일 수도 있는 허용이나 관용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항구적인 무관심임이 밝혀진다.

그들은 남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라고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일 말고는 관심이 없다.” 그 결과 영국처럼 괴짜들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곳은 없다.”

이렇게 이상화된 영국인의 초상이 얼마나 실제와 가까운지 따지는 건 부질없어 보인다.

에머슨의 요점은,

자유에는 개인적인 용기가 필요하고 집단적인 무관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식은 이런 생각에 저항한다.

지난 백년간 우리의 언어는 공동체와 배려를 중심에 놓고 진화해왔기에, 사회가 개인에게 무관심도 제공해야 한다는 문장은 뭔가 오류로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신경을 끄지 않고, 시선도 떼지 않고서 어떻게 상대방에게(그리고 나에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 자녀나 부모, 직장 동료 문제로 힘들어서 상담을 받는 경우, 짐작할 수 있듯 최종 해답은 문제의 인물이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영향 받거나 영향 주려고 하지 말고 무관심해지라는 것이다.

스팅의 노래 중에 사랑한다면 그들을 놔줘’(If You Love Somebody, Set Them Free)가 있다.

에머슨이라면 조건절은 사랑하지 않아도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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