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기술과 아날로그 감성

닭털주 2022. 6. 18. 07:41

기술과 아날로그 감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20년 만에 스케치북을 하나 샀다. 초중고생용 에이3 크기 스케치북 말이다.

그림이 목적은 아니고 집에 있는 책의 목록을 적으려는 것이다. 그걸 하필 스케치북에 적냐는 의문에 답하려면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가야 한다.

그해 말 내년부터 미술수업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몇장 쓰지도 않은 스케치북을 뭐에 쓸까 하다가 그동안 사모은 책들(주로 추리소설)의 목록을 적었다.

왼쪽에 0001부터 시작하는 일련번호를 적고, 작가 역자 제목 출판사 등을 적었다. 일련번호는 책에도 옮겨 적었다. 책을 사면 호적등록 하듯 그렇게 했다.

그럼 뭔가 정식으로 소유한 느낌이 들었다. 그 스케치북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기록 방식을 디지털로 바꾼 건 2000년께부터다.

엑셀과 디비(DB), 휴대폰 메모장까지 여러 방법을 써봤는데, 안착한 곳은 없었다. 바코드 인식만 하면 되는 최신 앱들은 바코드 없는 옛날 책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한두해 전부터는 책을 사도 기록하지 않게 됐다. 일단 기록하는 걸 자주 잊었고, 나중에 생각이 나면 하기가 귀찮아졌다.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스케치북을 다시 사용할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장서목록이 일과 너무 비슷했다는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첫 회사부터 고객디비 만드는 일을 하더니 출판계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도서디비를 만들게 됐다(본업도 아닌데). 아무튼 회사에서는 유용한 도구가 집 책정리에 안 맞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디비는 갖가지 통계를 낼 수 있게 해주지만 당연히 집에서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았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진짜 필수항목은 하나, 최종 일련번호였다. 책에 그걸 적어야 하니까. 디지털 도구들은 그 번호를 바로 확인하는 데 최적화돼 있지 않았다. 일단 기기가 켜지기를 기다려야 했고, 들어가서 확인하고 나면 문득 이게 최종버전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요컨대 디지털 목록은 좀 비효율적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글은 이미 익숙한 형식, “나는 엘피판(또는 필름, 또는 잉크펜 등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아날로그 감성으로의 복귀담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뭐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겠다. ‘아날로그 감성은 그 상품성 때문에 과장된 역할을 부여받아 왔다. 그러나 여기서 현안은 어느 생활양식이나 취미가 매체를 바꿔도 지속 가능한가라는 문제이다.

즉 이런 글의 필자들은 엘피판과 필름카메라와 잉크펜이 더 훌륭하다는 주장보다,

시디나 컴퓨터로 음악을 듣다 보니 음악과 멀어졌고,

디카로 찍다 보니 사진에 흥미를 잃었고,

자판으로 쓰다 보니 일기를 안 쓰게 됐다는,

예상할 수 없었던 개인적 위기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다.

왜 멀어지고 흥미를 잃는지우리는 아직 모른다.

감도 못 잡고 있는 듯하다. 여러 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일 텐데 말이다.

감성이라는 말이 엉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가리키는 문제까지 시시해지는 건 아니다.

장서목록의 문제는 간단하다.

편의성 부족이 문제였고 더 편리한 방법이 나오면 된다.

음악 등 취미의 문제들은 이보다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굳이 체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이미 발명되어 있다식의 단언은 늘 나를 놀라게 한다.

그걸 어떻게 아는지? 디지털 때문에 뭔가 상실됐다는 게 아날로그가 궁극의 형태라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단지 기술이 갈 길이 얼마나 먼지 보여줄 뿐이다.

기술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다. 기술은 아직 너무나 세련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상황의 진면목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에서 알랭 바디우가 썼듯이 말이다.

기술은 더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