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지역을 사는 감각

닭털주 2022. 6. 21. 13:37

지역을 사는 감각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대표

 

 

내가 사는 고흥에서 서울에 사는 강사를 섭외하게 되면,

대중교통으로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먼저 알아보고 강연 시간을 잡는다.

그리고 대부분 터미널에 나가서 강연장까지 강사를 모셔오고 강연이 끝나면 대중교통 시간에 맞춰 다시 터미널에 데려다주거나 아니면 숙소를 제공하는 게 보통이다.

강사료에 더해 교통비를 따로 책정하고도

강사가 멀리까지 온다는 미안함에,

가능하면 근처 지역을 묶어서 잇달아 행사를 잡으려고 다른 지역에 강연을 연결하고

각 지역의 일정을 조율해서 일정을 맞추려고 노력할 때도 많다.

 

한편 서울에서 내가 강사로 초대받았을 때

나는 보통 두세시간짜리 강연을 위해 으레 이틀을 비운다.

아침에 강의가 있으면 전날 출발해서 여관 잠을 자야 하고,

오후나 저녁에 강의가 있으면 다음날 출발해야 고흥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대부분 시간당 강사료 외엔 받지 못한다.

당연히 교통비를 따로 책정하는 경우는 드물고,

숙박비나 서울에서의 숙소 제공은 기대조차 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다.

친구가 다른 볼일이나 여행으로 오는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멀리서 친구가 오니 어찌 아니 기쁠까?

나는 친구가 고흥에 머무는 기간만큼 가능한 대로 일정을 비운다.

현지인만 아는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운전해서 함께 다니고,

지역 특산물을 먹이려 애쓰고,

집에서 재우거나 그럴 형편이 안 될 땐 미리 숙소를 찾아둔다.

한편, 내가 서울에 가면 친구들도 무척 반가워하며 시간을 내지만 대개는 하룻저녁이다.

함께 밥을 먹고 즐겁게 가진 술자리를 파하고 나면 친구들은 대부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서울에 재워주겠다는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정이 끝나고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폐를 끼칠 마음은 쉽게 내기 어렵다.

지방이라도 기차역이 있고,

특히 케이티엑스(KTX)가 서는 시 단위와 그렇지 않은 시·군 단위는 또 다르다는 걸 고려하는 서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강의 뒤 뒤풀이나 친구들과의 술자리 끝에 돌아서서 총총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뒤에 혼자 남은 허허로움을 경험한 뒤로는 서울에 볼일이 생기면 미리 숙소부터 예약하는 습관이 생겼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런저런 투쟁이 벌어질 때도

지방 사람들과 서울 사람의 마음은 좀 다른 것 같다.

그럴 때 에스엔에스(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애를 태운다.

연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마음은 늘 무겁고, 부끄럽다.

기껏해야 에스엔에스에 지지를 표명하거나

몇푼 안 되는 후원금을 보내면서 뭔가 죄스러운 기분을 느낀다.

그런데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내가 고흥에 오기 전부터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져 왔고,

그것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서울에서 연대에 열심인 사람들도

이곳의 투쟁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나처럼 애를 태울까?

도시에서 쓸 전기를 위해 핵부터 화력, 폐기물, 풍력, 태양광에 이르기까지 발전소란 발전소는 다 떠넘겨져도 되는 지방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쉼 없는 싸움에 가장 전기를 많이 쓰고 사는 서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서울 사람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서울과 지방의 차이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렇게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고,

일과 사람에 대한 태도와 관습에도 이렇듯 영향을 미친다.

서울만 다른 것도 아니다.

서울부터 지방의 대도시, 소도시, 군 단위, 면 단위에 이르기까지 위계는 자명하다.

나는 조만간 읍내에서 면 단위로 이사를 한다.

아마 면 단위 사람들의 감각은 읍내에 살던 내 감각과는 또 다를 터.

하루에 버스가 몇번 서지 않는 마을에서 나는 무엇을 마주치고 또 무엇이 미안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