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닭털주 2022. 7. 5. 13:18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편집주간

 

 

어쩌다, ‘비정상회담출신 청년들 틈에 앉아 여러 나라의 공원 문화에 관해 수다를 떠는 유튜브 방송에 나갔다. 영국인 친구가 나보다 훨씬 유창한 한국어로 물었다.

왜 한국 사람들은 공원 잔디밭에 앉거나 눕기를 꺼리죠? 잔디에 대한 거부감이 있나요? 유럽 사람들은 옷까지 벗고 누워 즐기는데.”

영국은 일조량이 부족해서 그렇고 우리는 햇빛이 풍부해 그늘을 찾느라 그럴 거라는 일반론으로 얼버무렸지만, 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잔디밭은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금단의 땅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궁이나 공원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공장소 잔디밭에 견고한 철제 펜스와 함께 경고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파트 단지에는 모든 동마다 넓은 잔디밭이 있었지만, 그곳을 가로지르며 뛰노는 건 모험을 넘어 일탈로 여겨졌다.

내가 일하는 학교의 행정관 앞에는 총장잔디라는 거룩한 이름의 잔디광장이 있지만, 그저 바라볼 수만 있는 출입 통제구역이다. 금기를 깨고 성역을 활보한 적이 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감촉에 황홀했지만, 꼭 빨간불에 횡단보도 건너는 느낌. 등 뒤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

순간 푸코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감시와 처벌.

 

잔디는 금단의 상징인 동시에 이상과 권위의 징표다.

개인 저택이나 공공 건물 앞에 장식용으로 심고 가꾸는 잔디밭은 베르사유 궁원으로 대표되는 17세기 프랑스 정원에서 본격 등장한다.

정원사들이 따라야 했던 원칙은 잔디라는 풀을 질서에 복종시키는 것.

자연의 풀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관리하려면 많은 노동과 비용이 필요했다.

이상주의 풍경화를 모방해 만든 18세기 영국 정원을 통해 잔디 초원은 정치권력,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자연 구릉의 목초지처럼 보이는 영국식 정원은 야생 초화를 허용하지 않고 정갈하게 풀을 깎아 빈틈없이 줄 세운 통제와 관리의 산물이었다.

잔디 깎는 기계와 스프링클러가 없던 시절, 관조와 감상의 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잔디밭을 완벽하게 관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자본과 농노였다.

낫으로 풀을 베는 시대가 끝나자 푸른 잔디를 동경하며 소유하는 계층의 폭이 넓어진다.

특히 잔디 문화가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이식된 뒤 잔디밭은 도시 교외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보편화된다.

오늘날 잔디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작물이다.

그 면적이 옥수수밭의 세배가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행복한 가정의 대명사인 푸르른 잔디마당,

그 미학적 규범은 균일과 질서, 정돈과 청결이다.

주말을 바쳐 풀을 깎는 가사노동에 근면과 예의, 가족주의와 시민의식 같은 도덕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잔디가 무릎까지 자라거나 잔디밭에 민들레가 침입하도록 방치하는 건 나태와 부도덕의 징표다.

강박과 중독에 가까운 잔디 사랑은 종신 고문에 비유되기도 한다.

잔디에 대한 동경은 두바이 같은 사막도시에서도 다르지 않다.

영화 <기생충>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의 부유층에게도 잔디밭은 자부심 충만한 공간이다.

전격 개방된 청와대 정원과 조감도 속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마당은 여전히 녹색 잔디 카펫의 권위를 붙들고 있지만, 지구촌 전역의 잔디 신화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기후위기의 타격을 입고 있는 지역에서는 잔디밭 자체가 퇴출되는 중이다.

수년째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서는 잔디가 말라 죽어도 내버려둬야 한다.

네바다주는 비기능성 잔디밭을 아예 불법화했다.

과도한 시간과 에너지, 막대한 양의 수돗물과 농약, 해로운 살충제와 제초제에 의해 유지되는 초원. 이제 미학적으로도 올드 패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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