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글살이] “김”
올겨울 들어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한 1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시민들의 입김이 뿌옇게 보이고 있다. 김명진 기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김’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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