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치 않은 친일파,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 문인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용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말했다. 이 나랏말쌈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도 당연히 달랐지만,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강요했다. 그들의 용어로 하면 '국어 상용화' 정책을 강제한 것이다.
일제가 한국의 말과 글을 억압한 1차적 의도는 징병제에 있었다.
한국인을 일본 군인으로 만들려면 한국어부터 없애야 한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2019년에 <일본문화학보> 제83집에 수록된 송숙정 중원대 연구교수의 논문 '일본이 식민지에서 자행한 국어 상용화 정책에 관한 일고찰'에 조선총독부의 1942년 자료인 <극비 조선인 징집에 관한 조사>가 인용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징병제 실시 계획이 발표된 1942년에 한국인 징병 적령자 21만 4229명 중에서 일본어를 해득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24%인 5만 1959명이었다.
외국 지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징세 대상자는 언어가 달라도 무방하지만 징병 대상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지휘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병사들 간에도 전우애가 형성되기 어렵다. 이런 상태로는 한국 청년들을 일본 군인으로 개조하기 힘들다는 게 일본의 판단이었다. 1942년에 국어 상용화 정책이 조선에서 실시된 데는 그런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친일파들은 그 정책을 위해서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일본어 상용화 정책은 총독부 단독으로는 관철되기 힘들었다. 한국어 사용자들을 일어 사용자로 만드는 일이었으므로, 두 언어에 모두 능한 친일파들이 앞장서야 정책이 수월하게 성사될 수 있었다.
이 일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파가 김용제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친일을 했는가는 페이지 숫자로도 증명된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3권 김용제 편과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용제 편의 분량은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위 보고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게 1인당 평균 20쪽 미만의 분량을 할애한다. 그런데 김용제 편에는 62페이지가 할당됐다.
전 3권으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은 친일파 4389명에게 1인당 0.63쪽을 할애한다. 그런데 김용제에게는 6쪽이 배당됐다. 이 정도면 김용제가 범상치 않은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가 얼마나 '애국자'이며 얼마나 '국어'를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의 나랏말쌈은 '듕귁'뿐 아니라 '조센'과도 달랐던 것이다.
일본어 상용화의 대표적 인물
김용제(金龍濟)가 일본어 상용화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점은 이 분야 최초의 총독상 수상자라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43년 3월 21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반도 문단의 영예인 총독의 국어문학상 - 김촌용제(金村龍濟) 씨의 <아세아 시집>으로 결정 추천'이라는 기사는 그가 제1회 국어문예총독상 수상자임을 알려준다.
한국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역사학자 임종국은 한일협정 이듬해인 1966년에 펴낸 <친일문학론>에서 "국어문예총독상은 반도 문예의 건전한 발전과 반도 문단의 국어화 촉진을 목적"으로 했다고 소개하는 한편, 김용제가 제1회 상을 받은 것은 "작품의 내용이 타는 듯한 일본 정신에 의하여 일관되었을 뿐 아니라 원숙한 문학적 형식"을 갖췄다고 평가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제 강점 1년 전인 1909년 2월 3일 충북 음성에서 태어난 김용제는 10대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청주중에 입학한 그가 "1927년 부친의 파산으로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할 때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면서 "단신으로 도쿄에 도착했다"고 기술한다.
그는 의지만 강했던 게 아니라 의식도 건전했다. 전 세계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배달 일 등을 하며 고학을 하다가 1929년에 주오대학 법과에 입학한 뒤 곧바로 중퇴한 그는 문학적 재능을 제국주의 비판에 활용했다.
21세 때인 1930년에 일본 좌파 문예지인 <신흥시인>을 통해 등단한 그는 동년 9월 창립된 일본 프롤레타리아시인회 간사가 되고 1931년에는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과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KOPF)에 가입했다.
이런 좌파 활동은 그에게 고초를 안겼다. 1932년 6월에 체포돼 1936년 3월에 출소했고, 동년 10월 다시 체포됐다가 11월에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28세 때인 1937년, 결국 그는 조선으로 강제 송환됐다.
5년간의 고초는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귀국 이듬해인 1938년 7월, 그는 일본 군국주의 단체인 동아연맹의 간사가 됐다. 군국주의 단체의 회원도 아니고 간사가 된 것은 이 시기의 그가 일본이 볼 때 믿음직한 인물이 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친일파로 변신한 김용제는 주특기인 문학뿐 아니라 강연과 시낭송회 등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한 1937년 이후에 친일파가 됐으니, 이런 활동은 대륙침략을 응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는 "학병·징병을 선동·찬양",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선동", "대동아문화 수립에 진력" 등의 표현을 써가며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다.
한국어와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 친일 문인
▲ 1994년 6월 23일 자 <동아일보> 기사 '시인 김용제씨 별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가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짜냈는지는 그의 작품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1943년 8월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란 시에서는 일본군에 끌려가는 청년들을 묘사하면서 "기쁜 눈물에 말이 많지 않았다/ '간다! 갑니다' 하고만/ '갔다 온다'곤 하지 않았다"라고 읊었다. 끌려가는 한국 청년들이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는 작품이다. 그런 식으로 강제징병 대상자들에게 메시지를 암시했던 것이다.
1942년 2월에 발표한 '소부(少婦)에게'란 시에는 "남편이 총 잡으면 슬픔 없이 환송을 노래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끌려가는 남편들뿐 아니라 배웅하는 젊은 아내들의 의식에까지 군국주의 충성심을 퍼트리려는 의도를 갖고 시를 썼던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문인들과 달리 친일 조직의 실무자로도 왕성하게 활약했다.
국민문화연구소 이사 겸 출판부장, 동양지광사 사업부장·편집부장, 조선문인협회 상무, 총독부 학무국 파견원 등등의 경력을 남겼다. 일본을 위해 글도 많이 쓰고 각종 단체의 실무도 왕성하게 처리했으니, 친일 재산도 그만큼 축적했으리라 볼 수 있다.
고학 시절의 생활력이 친일에도 반영된 것이다.
김용제가 일본어 상용화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어학 및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학하면서 일본 유학을 한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신도 1943년 3월 21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국어문예총독상 수상 소감에서 "처음부터 국어로 문학을 시작한 동경 시절 이래 15년 동안"을 언급하면서 감격스러워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그의 청년기 고생은 일본의 세계침략을 위해 활용된 셈이다.
그의 해방 이후 행적은 충성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1949년에 친일청산 기관인 국회 반민특위에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일을 설명한 직후에 "1951년 6·25전쟁 중 김해에서 미군 정보기관에 초빙되어 서울로 와서 심리작전·흑색선전의 책임자로 참전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고 서술한다. 일제의 심리전·선전전 기술자였던 그가 미군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설명이다.
그 역시 자신의 친일이 어느 정도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1978년 8월 <한국문학>에 발표한 산문 '고백적 친일문학론'과 1993년 8월 일본의 시문학 동인지인 <자오선>에 발표한 소설 형식의 수기 <환상>을 통해 자신의 친일은 항일 지하운동을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본인의 주장일 뿐 객관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고 <친일인명사전>은 알려준다.
김용제가 세상을 떠난 것은 85세 때인 1994년 6월 22일이다. 일본어 상용화에 협력하면서 동족을 징용·징병 등으로 내몬 반민족행위자였지만,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시인 김용제 씨 별세'는 "김씨는 민족시·서정시에 주력"했다고 호평했고, 같은 제목으로 같은 날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는 "김씨는 일제하에 민족시 서정시에 주력"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어와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인 친일 문인이 그런 평가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1990년대 중반에 그렇게 죽었다. 동료 문인들이 그의 친일을 적극 비판했다면, 해방 50년이 다 되는 시점에 그런 보도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 문학계의 친일청산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김용제의 죽음이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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