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입력 : 2023.06.22 03:00 수정 : 2023.06.22. 09:38 인아영 문학평론가
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할리우드 배우들이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좌담에서 진행자가 물었다.
연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연기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연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연기가 아니었다면 체포되었을 만한 행동을 해볼 수 있거든요.
솔직하고 재치 있지만 익숙한 답변이 이어지는 와중에 순서를 기다리던 짐 캐리의 대답은 현장의 공기를 단숨에 바꾼다.
“저는 부서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I act because I’m broken).”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다.
“저는 수많은 조각들로 부서진 사람이고,
연기는 수많은 조각들을 1000개의 다른 모양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짐 캐리가 자신이 유난히 상처가 많은 사람이며 그래서 연기를 하기에 유리하다고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런 생각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부서지고 깨어지고 어긋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삶을 살아가는 데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골의 소설을 읽은 미국 작가 조지 손더스가 말이다.
손더스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체호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와 같은 19세기 러시아의 대작가의 단편들을 조목조목 분석해나가다가 고골에 이르러 그의 소설이 너무 괴상하다고 평가한다. 이를테면 <코>라는 소설은 어떤가.
이발사인 이반 야코블레치가 아침에 일어나 먹는 빵에 손님의 잘린 코가 들어가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그 코를 발견한 이반의 아내는 놀라지도 않고 왜 손님의 코를 잘랐냐며 화를 내고, 이반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면서 책임을 피하기 위해 몰래 코를 갖다버릴 계획을 짜지 않는가.
사건도, 인물도, 결말도 앞뒤가 맞지 않고 어딘가 어긋나 있지 않은가. 손더스는 말한다.
<코>는 바닥에 펼쳐져 있는 깨진 조각들이며 그 조각들을 다시 짜맞추려고 하면 들어맞지도 않는 소설이다.
이것은 비난일까? 누군가에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손더스는 덧붙인다.
이 소설은 애초에 하나의 매끄러운 꽃병이었던 적이 없다고.
(문학비평가 클린 브룩스의 유명한 비유를 빌린다면 ‘잘 빚어진 항아리’였던 적이 없다고.)
완벽한 꽃병을 실수로 깨뜨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갖가지 조각들을 만들어서 펼쳐놓은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상한 행동을 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결과에 이르는 것은 논리적인 오류나 무작위의 배치가 아니라 실제로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무엇보다, 그런 것이야말로 바로 삶이라고.
(“알다시피 어느 누가 어긋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고골의 소설은 이 세상에 마치 정확한 서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척하지 않고, 여기저기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고 이상한 것들과 그사이로 뚫고 나오는 언어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과 가장 닮아 있음을 알려주는 위대한 소설이라고.
그러니 ‘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연기’를 ‘글쓰기’로, 더 나아가 ‘삶’으로 바꾸어도 짐 캐리의 통찰을 빌리는 일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 짧은 글에서조차 “더 정확히 말하자면”이라는 말을 거듭 쓰며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삶이란 완전무결한 꽃병의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말끔하게 이어붙이는 과정이 아니라, 애초에 부서져 있는 수많은 조각들을 가지고 그 조합만큼의 가능성을 살아보는 과정이며,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글을 쓰고 또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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