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우리에겐 더 다양한 말이 필요하다

닭털주 2023. 10. 8. 19:04

우리에겐 더 다양한 말이 필요하다

입력 : 2023.10.04 20:38 수정 : 2023.10.04. 20:39 오은 시인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한가위 연휴가 겹쳐 많은 이들이 따로 또 함께 시청했을 것이다. 연휴의 어느 날 찾았던 식당에서도 아시안게임이 중계되고 있었다. 셔틀콕이 아슬아슬하게 네트를 넘어가고 축구공이 시원하게 잔디밭을 가를 때 입이 떡 벌어졌다. 먹기 위해서 벌린 입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이다. 각자의 탁자를 앞에 둔 채,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화면으로 쏠려 있다. 탄성이 터질 때 감탄과 탄식이 자리를 뒤바꾸는 건 예사다. 승패가 결정되면 사람들은 다시 탁자 위로 고개를 수그린다. 승부가 나는 것도 아닌데 일제히 손이 바빠진다.

 

경기에 이긴 선수의 탁월한 기량에 손뼉 치면서도,

진 선수의 얼굴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문학은 성공과 승리의 언어로 쌓은 탑이 아니라,

실패와 패배를 껴안고 어렵사리 올린 돌무더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진 선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대회를 위해 갈고닦았을 지난 시간이 짐작되기도 한다.

 

코트 위에는 땀이 흥건하고, 진 선수의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뒤덮여 있다. 화면은 포효하는 승자의 앞모습과 패자의 뒷모습을 차례로 비춘다.

이럴 때 카메라는 지독히 매정하다.

승리는 달콤하고 패배는 쓰라리다.

암암리에 체득된 약육강식의 세계관이다.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문장이다.

 

경기 상황을 묘사하고, 그 결과를 설명하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통한(痛恨), 담금질, 악몽, 후폭풍, 몰상식, 좌절, 뼈아픈 실책, 설욕, 맹비난 등 처음 접했을 때는 눈을 홉뜨게 만들던 말들이 더 이상 충격을 주지 않는다.

관성의 영향이다.

충격, 쇼크, 비극, 참사, 융단 폭격, 트라우마 등 사회면에서 접하던 단어들을 마주할 때도 있다.

파토스를 유발하는 표현의 자극성이 떨어지자 머리기사는 더 강렬하고 도발적인 문구로 바뀌었다. 정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표현 때문에 경기 내용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내가 만일 감독이었다면 선수에게 기사를 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언론 보도에서

골치가 아프다,

어깨가 무겁다,

무릎을 꿇(),

눈 뜨고는 볼 수 없다,

코가 납작해지다,

간이 콩알만 해지다,

가슴이 내려앉다,

손에 땀을 쥐다,

오금이 저리다,

발을 동동 구르다 등의 관용어를 찾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관용어는 일상 깊숙이 스며든 말이다.

순히 흥미진진하다’ ‘안타깝다’ ‘지다라고 표현하는 대신, 이를 다르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재빠르게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신체 부위와 연관된 관용어만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관용어만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효과를 거두는 말이 또 없다. 관용어의 범람 속에서 꼼짝없이 온몸을 자극받는 건 우리다.

 

꺾다해내다’, ‘물리치다의 반대편에 있는 말을 생각해야 한다.

이긴 선수의 서사뿐 아니라 진 선수의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안타까운 패배라는 말에 들어 있는 감정은 선수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이다.

유포되면서 점점 부풀려지는 감정이다.

동메달이나 은메달을 따고 환히 웃는 선수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기도 하다.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선수들에게 승패의 언어는 가당찮을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떠돌다 유행하기 시작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를 떠올려보라. 우리에겐 더 많은 말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더 많은 말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다양한 말이 필요하다.

승패와 상관없이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말이,

경기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는 데 있어 신중함이 깃든 말이.

이 신중함은 단번에 습득되지 않는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패자를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늘 언어 건너편을 살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