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조금 기다려도 괜찮으실까요?

닭털주 2024. 2. 15. 09:35

조금 기다려도 괜찮으실까요?

어차피 혼잔데

수정 2024-02-15 08:11 등록 2024-02-15 08:00

 

이명석문화비평가

 

 

작은 파티를 연 주인이 못마땅한 듯 플라스틱 탁자를 툭툭 쳤다.

큰 맘 먹고 주문한 테이블이 있는데, 세관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네요.”

내가 말했다.

요즘이 그럴 때죠.”

 

연말연시부터 설날연휴까지, 소중한 사람 혹은 스스로를 위한 선물 상자들이 공항과 항구 세관에 긴 줄을 지어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시즌이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이유로 관세청 앱을 수시로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언젠간 오겠죠. 기다리는 것도 재미예요.” 주인의 말에 같이 빙긋이 웃었다.

 

며칠 뒤 동네를 걷는데, 평소 긴 줄이 당연하던 유명 식당 앞이 한산했다. 줄서기를 워낙 싫어하는 나였지만 꼬리에 붙어보기로 했다. 겨우 두세팀 기다리고 있으니 10분 정도면 되겠지? 착각이었다.

30분이 지나도 한테이블도 빠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포기하자니 기다린 시간이 억울했고,

뒤로 서너팀이 더 붙은 걸 보니 이 자리의 가치도 아까웠다.

 

그때 앞에 선 사람이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큰일이 생긴 듯 긴장한 표정으로 받았다.

혹시 빨리 가야 할 일이 생긴 걸까? 나는 야비한 기대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저런, 어떡하냐? 다른 데 갈 생각은 없고? 그래, 요즘은 재수는 기본이더라. 아 맞다, 삼수가 되는구나. 그래도 긴 인생에 한두해는 아무것도 아니야. 맞아. 의대 정원 늘린다는데 기회가 될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대학 정시모집 발표 주간이었다. 앞사람은 전화를 끊더니 한숨을 내쉬며 일행에게 말했다.

아휴. 말이 쉽지. 1년 뒤에 가고 싶은데 간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

세상에는 기다리면 어쨌든 오는 무언가가 있고, 기다려도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앞과 뒤를 기다리는 마음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끈기가 없는 사람은 아닌데,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를 갖다 바치는 건 싫었다. 대학교 때 교내 언론사에 있어, 졸업하면 신문사에 들어갈 거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언론고시라는 과정 앞에 서자 주춤했다. 몇년 준비하다 떨어지면 허송세월하는 거잖아.

결국 면접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인터넷 벤처에 잠시 몸담았을 때는 미래의 대박을 꿈꾸며 밤을 새는 동료들과 결이 맞지 않았다. 월급 대신 주식을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몇달치 밀린 월급이 들어오자 사직서를 내고 유럽여행을 갔다.

 

가끔은 어른들로부터 그런 결정을 나무라는 말도 들었다.

소탐대실.

눈앞의 과실에만 매달리는 쫌생이다.

돌아보니 우리 사회의 성공 공식 역시 그랬다.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으로 내신을 다지고 수능점수를 얻고 대학에 들어가 스펙을 쌓아 취직하고 돈을 벌어도 끝나지 않는다. 전세를 끼고 갭투자 해서 그 이익에 겨우겨우 대출을 더해 자기 집을 얻고 나서도 숨을 돌리지 못한다.

기다림과 기다림과 기다림의 연속.

이 기나긴 과정을 견뎌내는 자만이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고 한다.

 

행복에도 유통과정이 있죠. 그런데 꼭 그렇게 멀리 돌고 돌아서 배달되는 행복만을 추구해야 할까요?”

 

나는 청소년 강의에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언제 올지 모를 미래의 행복을 위해 경력, 인맥, 재산을 쌓아가는 것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직접 만들어볼 방법을 찾아보라고.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키워 어떤 과정으로 배달하는지도 모르는 농산물 대신,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로 요리해 먹는 삶을 생각해 보라고. 어느 학생이 물었다.

그런데 채소는 슈퍼에서 사는 게 빠르지 않나요? 요리보단 배달이 빠르고요.”

 

강의 뒤 돌아오는 기차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왜 텃밭 채소를 길러 먹는 긴 과정을 지루하다고 여기지 않지?

고시공부 하라면 지겨워 몸을 비틀겠지만,

원고지 수천매 책을 몇년째 쓰는 일은 태연히 하고 있다.

그래, 누군가에겐 한없이 지루한 일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그 학생이 자신 만의 텃밭을 찾길 바라야지.

 

그 사이 식당 줄이 조금 줄었다.

이 줄에 선 사람들이 긴 인생에서 무얼 기다리는지, 그걸 꼭 얻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줄만 서면 보장되는 맛있는 한끼에 매달리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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