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의지’가 지쳤을 땐 ‘우연’이 필요해

닭털주 2024. 2. 18. 11:03

의지가 지쳤을 땐 우연이 필요해

수정 2024-02-14 18:54등록 2024-02-14 15:54

 

 

[크리틱] 김영준ㅣ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나는 늘 계단으로 가는 쪽이었다.

계단을 뛰는 구간으로 여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행과 잠시 작별하고 따로 갈 정도였다.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이 습관을 놔버리기는 아까워서 몇번 다시 시도했으나 잘 안 되었다.

그런데 지난해 시험한 새로운 방법은 꽤 성공적이었다.

 

방법은 가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다.

, 엘리베이터가 내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만 탄다.

즉 올라갈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거나, 내려갈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중이면 탄다.

그 외에는 계단으로 간다.

복도에 나가면 엘리베이터 숫자가 말하는 것 같다. “타셔.” 또는 뭐해? 계단으로 가.”

 

아무튼 나는 우연이 친절을 베풀 때 빼고는 착실하게 계단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건 게임 같기도 하고 신의 섭리 같기도 하다.

옛날 아랍인들은 예고 없이 친구가 방문하면 약속이 있어도 외출을 포기했다고 한다.

약속은 인간의 의지이지만 돌연한 친구의 방문은 신의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이 지금도 이렇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기획보다는 우연에 더 기꺼이 복종한다는 것이다.

 

왜 우연에 복종하기가 더 쉬울까? 왜 힘이 덜 들까?

답하기 어렵지만 내가 깨달은 것은 그렇게 해서 절약되는 게 있다는 사실이다.

음악 취향이 확고한 지인들이 있는데, 그들도 라디오를 필요로 한다.

모든 음악을 직접 선곡해서 조달하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며,

우연히 들리는 곡에 귀를 맡긴 채 아무 생각 없이 쉬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취향의 중단이 아니라 취향의 영속을 위한 무의식적인 트릭이다.

 

나는 사진에 빠진 적이 있는데, 늘어가는 렌즈들을 골고루 이용하는 게 현안으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사용빈도를 집계해 낮은 순으로 들고 다녔는데, 실패였다.

마치 숙제하는 기분이었고 다음 차례는 어느 렌즈라는 걸 알고 있으니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순위 집계에 불확실성(난수)을 조금 첨가해 봤다.

10년 동안 엑셀이 그날그날 지정한 렌즈로 사진을 찍었다. 이건 꽤 오래갔다.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하면 재미가 없어진 순간, 즉석에서 기괴한 규칙을 추가해서 결말을 지연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아이들도 아는 것이다.

게임의 재미는 불확실성에서 온다는 것을.

마치 시즌 승률만으로 그해의 우승팀을 가릴 수 있지만 굳이 한국시리즈를 여는 프로야구처럼 말이다.

 

삶은 취미의 싸움이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 덕분에

우리는 취미가 일종의 자기주장이며 (남에게든 자신에게든) 꽤 호전적인 활동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아무리 고독한 취미도 자체적인 정복 대상, 명령, 보급의 체계를 요구한다. 사실, 업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것은 힘이 들며, 규칙을 수행하는 모든 활동은 의지라는 자원이 고갈되는 문제에 봉착한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좋아하던 것도 결국 지쳐서 놔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의지가 고갈된 문제를 의지를 더 발휘해서 해결할 순 없다.

의지는 모든 일을 해선 안 되며 때론 쉬어야 한다.

그때 사람의 바뀌지 않는 특질-우연의 지시는 쉽게 따른다든지, 예측이 안 될 때만 흥미를 유지하는-

활용해 보는 건 어떨까.

주로 계단으로 가지만 간혹 엘리베이터를 탈지도 모르는 게임처럼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놔버렸던 취미나 습관을 되살릴 수 있을지.

물론 우연에 따르는 한 당신은 100% 계단으로만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게임의 지속 시간은 예상을 초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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