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노년의 길목에서

닭털주 2024. 2. 16. 16:34

노년의 길목에서

 

젊은 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조금씩 주저앉아온 삶이라고 해서,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로는 이제는 세상일 좀 잊고 살아야겠다고 공언해보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잠시 눈을 감아볼 수는 있겠지만

남은 생 전부를 눈 감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이 세상과 타협하며 추하게 늙고 싶지도,

세상이 추하다고 혼자서만 곱게 늙고 싶지도 않다.

 

수정 2024-02-15 20:40등록 2024-02-15 18:47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지난 14일 마지막 급여를 수령했고 15일에는 19년 동안 지켜왔던 연구실에 남아 있던 마지막 책들과 책장, 책상과 의자, 그리고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등 연구실 살림들을 모두 치우는 작업을 마쳤다. 완전한 퇴임까지는 아직 보름 정도 시일이 남아 있지만 이제 연구실이라는 근거지도 사라지고 명예교수에게 허용된 퇴임 후 3년 간의 연장 강의도 사양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대학교수로서의 모든 일에서 놓여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만 나이로 65살이 된 지난해 늦가을 전철 무임승차 카드도 수령했고 국가 공인 노년층에 진입하면서 공원, 박물관 등 각종 시설물 입장료 할인 혜택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연금소득으로 기초생계는 어떻게든 갈음할 수 있어 절대다수의 동료 노년층들과는 달리 새로운 임금노동을 시작하지 않아도 되니 이제 나는 명실상부한 노년 은퇴자로 사는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여태까지는 직업과 노동의 논리에 강제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어떠한 외적 강제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는 다른 말로 하면 생산노동을 통한 사회적 개입 혹은 참여로부터의 이탈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곧 사회적 생명의 결정적 위축과 사회적 성원권의 약화를 뜻하기도 한다. 나도 비로소 젊은 세대로부터 툭하면 빨리 사라져주면 고마운 사회적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식충이 집단에 진입한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의미의 자유에 그대로 순응해도 좋은 것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 자의로건 타의로건 노동()의 상실로 말미암아 비참한 소외상태로 전락하는 절대다수의 하층계급 노년층에게는 은퇴 후의 자유라는 말은 애초부터 사치스러운 것이겠지만,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공적 영역에서의 퇴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유유자적하게 노년의 여유와 자유를 누리기에는 오늘날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현실은 그렇게 한가롭지가 못하다.

 

나는 이른바 ‘58년 개띠로서 대표적인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베이비붐 세대는 주지하다시피 전후 복구기에 태어나 경제개발 붐과 군사독재를 겪으며 물질적 허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의 갈등 속에서 성장하였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흐름 속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불일치라는 또 다른 갈등 속에서 성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세대이다. 나도 유소년기에는 여느 동년배들과 마찬가지로 냉전분단체제의 남쪽을 지배하던 반공제일주의와 가부장주의, 폭력적 군사문화에 찌든 채 성장했으나 운 좋게 동 세대의 10%도 안 되던 대학생이 되었고, 또 그중에서도 식민지와 분단 상황 속에 기형적으로 정착한 한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군사독재가 지배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극소수의 불순세력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신 체제와 그 종말, 12·12 군사반란과 광주 민중항쟁, 6월 항쟁 등을 거치면서 여느 동년배들이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시대의 신자유주의 호황기에 한국 사회의 예비 지배계급으로 발돋움하던 20대와 30대의 긴 시간 동안 나는 제적도 고문도 투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이른바 민족민중민주변혁이라 불리던 한국 사회의 일대 혁명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동요하며 보냈다.

 

하지만 세상은 요지부동이었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하고 심지어 많이 나아졌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허튼소리다.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누군가 민족해방을 주장하면 민족해방을 시켜주고,

민주화를 주장하면 민주화를 시켜주고,

심지어 노동해방을 주장하면 노동해방도 시켜주지만

절대로 주도권을 내주는 일은 없다.

제국주의도 전체주의 독재도 노동탄압도 필요하면 전부 철폐되지만

무한대의 이윤 추구와 그 동력인 무한대의 욕망,

그리고 그것들의 영원한 토대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절대로 철폐되지 않는다.

 

이 완고한 체제의 벽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자본주의의 철폐를 주장하던 모든 혁명적 기획은 자본주의의 힘 앞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헛된 몽상이라는 딱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기후위기가 큰일이라면서도 성장 동력이 고갈되는 것은 더 큰일이라 생각하며

이른바 보수 꼴통이건 좌파 빨갱이건 부동산과 주식값 하락을 걱정하고 자식들 좋은 대학 보내는 일에 대놓고 몰두한다는 점에서는 일치단결하는 세상이다.

나는 이런 세상을 미친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내 몫이 줄어들까 봐 전전긍긍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이고 정신분열에 가깝다.

어쩌다 운이 좋아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그 봉급으로 자식을 유학 보내는 그 순간 혁명을 꿈꾸었던 나는 사실상 전향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고문대나 감옥에서가 아니라

집 안이나 시장통에서 더 잘, 더 철저하게 전향하는 법이다.

 

이런 세상을 짧은 시간 안에 통째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렇게 바뀐 세상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인류사가 남긴 교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아무도 싸우지 않는데 세상이 저절로 나아질 리가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조금씩 주저앉아온 삶이라고 해서,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로는 이제는 세상일 좀 잊고 살아야겠다고 공언해보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잠시 눈을 감아볼 수는 있겠지만 남은 생 전부를 눈 감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건강이 허락하고 정신이 뚜렷하기만 하다면

앞으로도 부단히 생각하고 말하고 글 쓰고 행동하면서

이 요지부동의 세상에 맞서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과 타협하며 추하게 늙고 싶지도,

세상이 추하다고 혼자서만 곱게 늙고 싶지도 않다.

 

다만 요즘 들어 이 절망적인 세계가 그나마 조금씩 자기반성의 힘으로 바뀌어나갈 겨를도 없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가,

무엇을 희망하든 무엇을 기획하든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내 삶의 황혼이 곧 이 세계의 황혼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