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근시와 원시 [말글살이]

닭털주 2024. 7. 29. 09:44

근시와 원시 [말글살이]

수정 2024-07-25 18:40 등록 2024-07-25 14:30

 

 

클립아트코리아

 

 

병이 나거나 기능이 나빠지면 아픈 곳과 증상을 연결하여 이름을 붙인다.

위가 아프면 위염, 위궤양, 위암. 귀가 안 좋으면 중이염, 이명, 이석증이라 하는 식으로.

 

이런 상황은 어떤가. 방학 때 철수는 공을 차다가 왼쪽 발목을 다쳐 깁스를 했다. 개학을 하여,

방학 때 있었던 일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목발을 짚고 나온 철수가 이렇게 말했다.

공 차다가 다쳤는데 오른쪽 발목이 멀쩡해.”

우잉? 왼쪽 귀에 중이염을 앓는 사람이 의사에게 오른쪽 귀가 잘 들립니다라고 했다고 치자. 이 말을 들은 의사가 어디 보자하면서 왼쪽 귓구멍을 들여다볼까? 아프면 아픈 곳을, 다치면 다친 쪽을 말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시력을 나타내는 말은 이 자연스러움을 거스른다.

멀리 있는 게 잘 안 보여 버티고 버티다가 처음으로 안경점을 찾았다.

안경사가 하시는 말씀이 근시네요.” 가까이 보는 것에 문제가 생긴 걸까?

 

가까이 있는 건 잘 보여도 멀리 있는 건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근시’, 멀리 있는 건 잘 보여도 가까이 있는 건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원시라 한다.

괜찮지 않은 쪽이 아니라 괜찮은 쪽을 찾아 이름을 붙이다니.

색맹만 해도 적록색맹은 붉은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눈이다.

시력이 약하면 약시, 다 흐릿하면 난시, 양쪽 시력에 차이가 크면 부동시.

유독 근시와 원시만 좋은 쪽 편이다.

 

근시라는 말 속에 볼 시()가 있어 가까운 곳을 본다는 뜻이니 이해가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 있는 게 흐릿해서 안경점에 찾았는데, 가까이 있는 걸 잘 본다고 하니 동문서답의 느낌, 아니면 안과계에선 오래전부터 절대 긍정의 자세가 퍼져 있었을지도.

너무 근시안적인가?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