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하지 못하게
입력 : 2024.12.18 21:06 수정 : 2024.12.18. 21:09
현재는 필히 과거가 된다. 그리고 그 과거는 일부만이 역사로 기록되어 왔다.
지금껏 무엇이 어떻게 선별되어 역사로 기록되었는지,
왜 그것들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게 되었는지 새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올해 국가유산청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국가유산사랑’에 ‘근대와의 조우’라는 글을 매달 연재했다.
광주 양림동, 나주 영산포, 진주 에나길, 경주 읍성 둘레, 원주 대성로, 제주 모슬포 등
각 지역에서 반나절 찬찬히 걸어 둘러볼 수 있는 국가등록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동선을 짜 이야기를 엮었다.
우리가 흔히 국가유산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국보·보물·사적·명승·천연기념물·국가무형유산·국가민속문화유산은
모두 지정문화유산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은 지정문화유산이 아닌 근현대문화유산 가운데 건설·제작·형성된 지 50년 이상 지난 것을 대상으로 보존과 활용을 위해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문화유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등록한다.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멸실될 위기에 처한 시대적 상징물들이 생겨남에 따라 2001년에 이르러 국가등록문화유산 제도가 도입됐다.
개항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리 근현대사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군사독재라는 비극의 시간을 거쳤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내용들이 상당하고,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시시비비 논쟁이 붙기도 한다. 일례로 일제강점기 건물 보존을 두고 식민지 잔재니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과 아픈 역사의 근거로 남겨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일이 적잖다. 이런 가운데 혹자는 근현대문화유산에 대한 평가 기준이 뚜렷하지 않고, 가치 평가 역시 가변적이라 그와 관련한 얘기를 꺼내는 것은 불완전하고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오랫동안 지정문화유산을 중심으로 관리되어 왔고,
학계에서 근현대사 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돌아서면 잊고 또 잊는데도 틈틈이 근현대문화유산을 찾아다니고 기록해 왔다.
‘역사란 전공한 자에게만 이야기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인가?’
‘최고나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을 법한 자랑스럽고 기념비적인 것만이 역사에 기록될 가치가 있는 걸까?’
하는 물음 혹은 반감이 동력으로 작동했다.
한편 수백 혹은 수천 년 전 멀고 먼 이야기보다
나의 어머니·아버지, 할머니·할아버지가 살아온 시절을 마주하는 것이
역사라는 말 자체가 주는 무게감을 덜어주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고, 막막할 때도 많다.
참고로 지정문화유산은 원형을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엄격히 관리하는 반면,
등록문화유산은 소유자가 직접 신청해야 하고 보존·관리에 대한 책임도 소유주에게 있다.
소유주에게 보존과 활용의 자율성을 부과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상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이 때문에 등록문화유산을 찾아가면
시대, 쓰임, 표면적 특징 등이 간략히 기재된 표지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통이다.
그 앞에서 역사적 의미를 되짚는 덴 한계가 분명하다.
사람과 사건, 그를 둘러싼 맥락의 부재는
눈앞의 역사적 현장을 ‘나와 관계없는 것’으로 읽게 한다.
지난 보름여, 두고두고 회자될 역사적 순간을 관통하며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는 누가 어떻게 기록하여 훗날 역사로 인식되게 할 것인가?
아마도 근현대사를 다루는 박물관에서는 역사적 계기나 사건을 상징하는 자료 수집의 일환으로
갖가지 응원봉 수집을 시작했을 것이다.
언론도 매일같이 기사를 쏟아낸다.
그러나 공공기관도, 언론도 분명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포고령을 통해 똑똑히 목도했다.
다행인 것은 누구나 기록하고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대라는 것.
이 시대적 혜택을 실천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 됐다.
잊지 말자는 다짐은 무뎌지기 쉽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많이 기록해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누구도 감히 함부로 지워버리지 못하도록.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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