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픽션: 전략적 기만 혹은 속임수

닭털주 2022. 2. 9. 13:31

[김용석의 언어탐방] 픽션: 전략적 기만 혹은 속임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예술은 사기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현대예술사에 자리매김한 백남준이 1984<굿모닝 미스터 오웰> 발표 이후 귀국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다. 그는 예술가는 사기꾼 중의 사기꾼, 즉 고등 사기꾼이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겠지만, 그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했을 법하다.

 

예술이 사기이고 고도의 기만술이라는 발언은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 백남준 이전에도 그런 말을 한 예술가들이 있다. 피카소는 예술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만(mentira·멘티라)이다라고 했다. 그가 사용한 에스파냐어 멘티라속임수라고 옮길 수도 있다. 이는 예술가들 스스로 한 말이지만, 예술 행위가 사람들을 기만할 가능성에 대한 비판의 역사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 원조 격은 잘 알려진 플라톤이다.

그는 지난 이천여년 동안 과학의 진리성예술의 기만성을 대립시키는 의식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비난의 역풍을 받아왔다. 현대 양자물리학자들로부터는 엄밀 과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말이다.

플라톤은 선한 것은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것은 모두 기하학적인 비례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헌정 질서가 잘 잡힌 나라에서는 시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 시작(詩作)을 비롯해, 회화·조각 등 모든 예술적 창작은 만물의 수학적 원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세상을 모방해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을 기만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갈라놓은 것을 봉합하려는 논리를 개발했다.

그는 플라톤과 다른 관점에서 현상과 사물을 모방하는 창작 행위의 기능과 가치를 보았다. 그에게 예술적 모방은 새로운 차원에서 사물들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근본 원리 또는 진리를 빈곤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차원에서 풍부하게 확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개발한 전략은 유사성과 가능성의 원리인데, 예술적 모방은 진리에 접근할 다양한 가능성을 모의실험하듯이 만들어 보여주는 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은 허위에서 허구를 구분하는 시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시학에서 시는 오늘날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운문 형식을 뜻하지 않고, 창작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서양어에서 시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 포이에시스는 만든다는 뜻이고 포이에티케는 창작술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때 그의 사상을 해석하는 학자들도 이 영향을 받아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만들어내고 잘 꾸미는 것을 구분했다. 라틴어로 허위(falsum)와 허구(fictum)를 구분했다.

허위는 진리에 반하는 것이지만, 허구는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허구는 진리를 다양하게 탐구해볼 수 있는 통로를 시험적으로 제공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시학>에서 시는 진리의 철학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략으로 택한 유사성과 가능성의 원리는 결국 깨달음의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방법이다. 세상 만물의 원리라고 하든 진리라고 하든, 그것에 의식적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또는 맛볼 수 있는, 느껴볼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문예)는 철학적이라고 했다.

이제 피카소가 말한 속임수는 사실 전략적 기만임이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작으로서 예술이 보편성을 소통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예술과 과학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는 과제에서도 중요한 관점이 될 수 있다. 자연법칙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은 과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가설은 실험과 증명을 거치면서 궁극적으로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지향한다. 가설에서 출발하는 과학의 이론화 작업과 자연에 대한 설명 모델을 설정하는 시도를 일종의 허구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창의적 과학자의 작업 또한 예술가의 그것과 유사하다. 성공적인 과학적 허구인 수학화된 자연법칙이 우리 정신을 저 먼 우주의 블랙홀에 데려다주듯이, 탁월한 예술적 허구는 우리 영혼을 오색 돌고래가 춤추는 저 가없는 천상의 바다로 초청한다.

다만 예술에서는 허구로서 완성된 작품이 보편적 진리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 작동한다면, 과학에서는 자연법칙에 대한 가설과 우주 모델 같은 과학적 허구를 보편 법칙을 추구하는 과학적 성과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허구로서 완성되고, 과학은 허구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을 이렇게까지 해석해본다면, 그가 스승이 야기한 불화를 통합의 길로 가도록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의 기원을 탐구하는 영문학자 브라이언 보이드는 픽션은 우리에게 당면한 현실을 넘어 자유로이 성찰하도록 해주며, 우리 정신이 방대하고 풍부한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사물을 고찰하도록 해준다고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이 바로 엿보인다. 좀 상투적이지만, 우리가 좁은 의미로 설화, 소설 등 서사가 있는 문예 작품과 동일시하기도 하는 픽션이란 말의 오래된 미래를 본 것 같지 않은가.

오늘날 픽션의 개념은 소설 또는 허구로 옮기기엔 광활한 의미 영역을 포함한다.

사실에 엄격히 기초하지 않은 인물, 사건, 장소를 상상의 방식으로 묘사하는 모든 창조적 작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연극, 영화, 드라마, 만화와 웹툰, 각종 공연, 전자 게임, 메타버스 등 모든 매체로 표현되는 상상의 이야기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에 오티티(OTT)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 콘텐츠들이 가세한 지도 한참 되었다. 과학 기술과 예술이 융합해 만들어내는 새로운 픽션들도 속속 가세할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픽션 범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범람은 위험하다. 넘쳐 나는 픽션의 물결은 우리의 감각을 거쳐 우리 두뇌가 문화적 신진대사를 할 시간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양이 결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다.

빅데이터가 진실의 기준이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양적으로 거대해진 픽션의 세계는 어쩌면 사유할 틈도, 감동의 여운이 남을 겨를도 주지 않을 만큼 빨리빨리 소비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백남준과 피카소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대했던 픽션의 전략적 속임수도 소용없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