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약자 조롱해놓고 ‘웃자고 한 말’? 혐오는 블랙유머가 아니다

닭털주 2022. 4. 13. 17:30

약자 조롱해놓고 웃자고 한 말’? 혐오는 블랙유머가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위험한 농담

 

인종주의, 난민, 기후변화, 백신 등

다양한 주제로 퍼지는 혐오 표현

문제 되면 농담이라며 잘못 회피

표현의 자유=혐오의 자유아니야

 

 

 

캐나다 출신 유명 코미디언 놈 맥도널드가 지난 2016년 영화제 캐나다 스크린 어워드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작년 962살의 나이에 암으로 안타깝게 사망한 놈 맥도널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이다.

그를 처음 소개한 이전 글(2021814일치)에서도 썼듯이,

그는 무척 아슬아슬한 유머를 구사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망한 뒤에도 끊임없이 업로드되는 수많은 유튜브 영상으로 기억되고 동료 연예인들에게 위대한 코미디언으로 회자되는 코미디언들의 코미디언으로 남아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맥도널드의 아슬아슬한 유머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소 불편할 수는 있을지언정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른바 위험한 소재를 가지고 능숙하게 조크를 던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으레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결국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그리고 대체로 그 웃음은,

맥도널드의 조크를 들으면서 잠시나마 조마조마했던 자신을 향한 웃음으로 귀결된다.

 

위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유머

 

맥도널드는 사망 직전까지 동료 연예인을 한명씩 불러다가 말 그대로 아무 말이나 나누는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했다.

어느 날 방송에서 그는 게스트에게 미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 아동 살인범 앨버트 피시라는 인물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피시는 최소 셋 이상의 아이를 납치해 끔찍하게 고문한 뒤 식인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도널드는 앨버트 피시에게 희생당한 피해자들의 유형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거예요. 피시가 주로 희생양으로 삼았던 사람으로는 정신장애인이 있었고요, (중략) ,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듣고 절대 웃으시면 안 됩니다! 이 부분에서 웃으면 큰일 난다고요. 희생양은 주로 정신장애인이랑 흑인들이었어요.”

이 말을 들은 게스트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맥도널드는 옆에서 이봐요, 그게 뭐가 재밌다고 웃는 거예요? 맙소사, 그 부분이 최악인 건데!”라고 했고, 게스트는 그의 핀잔을 들으면 들을수록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웃겨서 그토록 심각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웃음을 못 참은 것일까?

맥도널드가 한 말에는 그 어떤 유머 코드도 없었다.

참혹한 사실들의 열거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청중들은 꼼짝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을 두고 맥도널드가 끔찍한 사건을 희화화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여기서 희화화한 것은 참혹한 살인 사건 및 인종주의가 아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잘못 말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하는 민감하고 위험한 소재를 가지고 농담할 때 극도로 조심스러워해야 하는 불편한 분위기를 희화화하는 것이었다.

맥도널드식 코미디의 탁월함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팬들이 그를 평가할 때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가 이른바

성역 없는 유머’,

용감한 유머’,

금기를 깨는 유머’,

앞뒤 재지 않는 유머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확실히 맥도널드의 코미디는 위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 위반이라는 것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에 맥도널드는 빠지지 않았다.

그 함정이란, 금기를 깬답시고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뭇사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희화화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조롱하면서 블랙유머라고 우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위반의 가치는 진보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저항적인 것으로 기려져왔다.

당연히 지켜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사회적 의례, 통념 등에 의문을 표시하고 반기를 드는 행위는 이데올로기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되는 출발점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표현의 자유가 지고의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권위에 저항해야 한다라는 당위는,

지금까지 정치적·사회적 운동으로 겨우겨우 쌓아 올린 자유주의적 가치를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코드가 다분한 발언을 던지고선 성역 없는 신랄함을 참칭하는 사람이 많고, 그렇게 옹호해주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윤리적 지탄을 받을 것 같으면 유머, 농담이라는 방패 뒤에 숨는다.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를 방어적으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혐오를 지양하려 하는 시도들에 표현의 자유를 해치려 한다는 비난으로 맞불을 놓는다.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와 함께 얽힌 위반의 가치는 특히 영미권의 젊은이들 사이에 과격한 극우주의적 혐오를 퍼뜨릴 수 있는 쓸모 있는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소셜미디어에 전시된 언어도단

웃자고 한 농담에 발끈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민망한 모습으로 비친다.

쿨하지 못한, 옹졸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유머는 유머로 받아들여라라는 말은 무척 위험한 말이다.

웃자고 한 농담이라는 것이 모든 발언을 허용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혐오 표현과 같이,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발언은 사회에 노출되어서도 안 된다.

최소한의 규범, 정도, 금기를 무시한 과격한 발언을

농담이라는 이유로 웃어넘기는 일이 반복되면

온갖 사악하고 유해한 메시지들이 유머로 둔갑하여 담론을 오염시키게 된다.

영미권 인터넷에서는 벌써 다음과 같은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종주의, 난민, 기후변화, 백신 혹은 홀로코스트 등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련한 천부당만부당한 언어도단, 몰상식의 극치의 망언을 소셜미디어에 전시한다.

이에 대한 반응에 따라, 해당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게시물의 성격을 사후 규정한다.

동의하는 댓글이 많으면 진지한 논평이다.

비난 댓글이 많으면 농담이나 풍자였다고 궤변을 뇌까리면서 발끈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는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온갖 해롭고 위험한 메시지들이 소셜미디어에 게시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신랄한 풍자인지, 진지한 멍청함의 소산인지, 그저 어그로를 끌기 위함인지 감별부터 해야 하게 되었다.

그 메시지의 유해성에 대한 진지한 논박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미디어문화 연구자. 첫 책 <프로보커터>에서 극단적 도발자들의 나쁜 관종현상을 분석했다. 한국의 20대 현상과 좌파 포퓰리즘, 밈과 인터넷커뮤니케이션 같은 디지털 현상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