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시스템 안에서 여유롭게 살 권리?
강수돌 칼럼
“위 사람은 행동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에 이 상장을 수여함.”
학창 시절에 보았던 ‘우등상장’의 내용이다. 소수의 모범생만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생들도 결국은 ‘방정한 행동과 우수한 성적’을 기준 삼아 살게 만드는 교육적 장치! 이 장치가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상을 받거나, 받는 걸 본 사람들은 (의식적이건 본능적이건) 나중에 취업하면 다음과 같은 포상을 바라게 될지 모른다.
“위 사람은 우수한 기량과 성실한 자세로 근로함으로써 우리 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기에, 이에 ‘모범 근로자상’을 수여함.”
이른바 ‘모범근로자’에게 주는 상이다. 누가? 기업이, 자본이!
아무 생각없이 자본 몫까지 생산해야 받는 ‘모범 근로자 상’
그러면 자본은 왜 ‘성실한 근로자’에게 상을 주며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일해야 한다고 넌지시 말하는가? 자본의 관점에서 인간 노동력이란 살아 있는 노동이다. 산 노동! 현재 행해지는 노동이다. 그러면 죽은 노동도 있는가? 있다.
기계, 원료, 부품 같은 게 죽은 노동이다. 이미 과거에 행해진 노동의 결과!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이 구분이 왜 중요한가?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의 결정적 차이는 산 노동(노동력)이 죽은 노동(원료, 기계)을 활용해 노동과정에서 과거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자본의 입장에서 굳이 돈(임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한 보람(이윤)을 맛본다. 그 결과가 상품의 가치로 귀결되고 이걸 우리는 가격이라 하고 화폐로 지불한다. 즉, ‘노동생산물(상품)의 가치(W)= 생산수단의 가치(c) + 노동력의 가치(v) + 잉여가치(m)’란 등식이 성립한다. 여기서 산 노동의 역할은, 과거 노동의 산물인 c를 새 상품 속으로 이전하는 동시, v와 m을 새로 만드는 것! c의 이전과 v의 생산을 위한 시간이 필요노동시간이라면, m의 생산시간은 잉여노동시간이다.
여기서, v는 임금이니 ‘자기 밥값’이고 m은 고용주인 자본을 위한 몫이다.
노동자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이 자본의 몫(m)까지 잘 생산해야 그는 비로소 자본의 관점에서 제대로 ‘밥값’ 하는 자, ‘성실 근로자’로 칭송, 표창된다.
그런데 이 ‘성실 근로자’는 열심히 일하고 정당한 임금을 받는 데만 신경 쓰지, 무슨 상품을 어떻게 만드는가엔 상대적으로 둔하다. 자본이 돈을 잘 벌어야 임금도 잘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에는 건강‧인명을 해치는 것(유해식품, 전쟁무기),
지구를 망치는 것(플라스틱, 일회용품),
공동체를 부수는 것(아파트, 자동차, 명품)도 많다.
그 생산과정에서는 기후위기를 부르는 온실가스도 방출하고
경쟁, 차별, 산재, 과로 문제들까지 발생한다.
상품 생산, 판매, 소비는 고갈, 소진, 파괴, 오염과 동전의 양면이다!
‘집단자살체제’가 따로 없다. 상품(가치) 사회는 이렇게 가치 증식에 올인한다.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이란 이렇게 잉여가치를 획득함으로써 몸집을 불려나가는 사회적 관계다. 즉, 자본은 겉보기엔 돈(자본)이나 물질(기계, 공장, 사무실, 상품)로 현상하지만, 그런 겉모습을 갖기까지의 역사, 나아가 그런 모습의 시스템이 탄생하고 유지되는 과정을 잘 보면 자본이란 결국 ‘사회적 관계’가 본질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 관계가 문제인가?
노동력 상품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적 관계
첫째, 광활한 자연 공간이나 공유지에서 살다가 ‘인클로저’로 토지에서 추방된 관계, 그리고 방랑 생활을 엄금하는 ‘유혈입법’으로 ‘구빈원’이라는 이름의 강제노역소에서 사실상 강제 노동을 하는 관계가 등장한 것이다.
F. 베이컨이나 R. 데카르트의 인간-자연 이분법은 자연을 대상화함으로써, 개발, 파괴, 훼손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 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자신의 생산수단과 자기 노동력으로 물건을 만들어 먹고 살던 관계들이 이제 노동력 상품을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관계로 변한 것이다.
J. 로크(1690)의 소유권 이론은 사람들이 자기 노동력을 소유물 내지 상품으로 대상화하는 데 기여했고, 이런 시각들이 결국 상품 소유자 간 계약관계를 중시하는 근대 사회를 낳는 토대가 됐다.
셋째, 삶을 지탱하는 데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가족, 마을, 지역 공동체가 갈수록 해체되고 (화폐, 국가 통일성 안에서의) 개인 역량(노동력, 각자도생)을 중시하는 조건들이 강화하는 것이다.
토머스 홉스(1651)의 <리바이어든>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각 개인들이 국가에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주권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넷째, 프랑스 대혁명으로 상징되듯, 자유, 평등, 소유, 이익을 핵심 가치로 하는 새 사회가 등장함으로써, 신분적 자유와 평등, 소유와 사익 추구를 (의심은커녕)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하는 것이다.
버나드 맨더빌(1714)의 <꿀벌의 우화>나 애덤 스미스(1776)의 <국부론>은 개인들의 이기적인 영리 추구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며 옹호했다.
한편, 우리는 허먼 멜빌(1853)의 <필경사 바틀비>처럼 ‘불성실한 근로자’도 여전히 많이 본다. “두드러지게 조용한 풍모를 가진” 바틀비는 뉴욕 월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고용됐다.
그런데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할 뿐 ‘다른’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고용주인 변호사가 다른 주문(예, 필경 내용의 재검토 작업, 사무실 밖으로의 심부름, 변호사 집의 방 하나를 써도 좋다는 제안, 심지어 사무실 이사에 협조해 달라는 부탁 등)을 하기라도 하면, 그는 늘 “차라리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답하곤 꼼짝도 않았다.
심지어 바틀비는 감옥에 붙들려가서도 식사조차 거부한다.
그렇게 죽어 간다, 그것도 아무 말 없이 기꺼이!
노동을 수행하면서도 거부하는 이런 ‘묘한’ 인간을 과연 자본은, 또 (자본의 이해동맹체 역할을 하는) 국가는 어떻게 감당할까? 역으로, 이런 인간 유형이 과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 상징되는 대안적인 사회를 창의적으로 구성해낼 수 있을까? 대안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바틀비 모델’은 아주 심각한 화두이지만, 실은 우리 앞에 더 절박한 질문이 놓여 있다.
나치 수용소와 다름없는 ‘노동의 내면화’
그것은 바틀비와는 정반대로,
“해고는 죽음!”
“청년 일자리를 많이 만들라”
“산단 개발로 일자리와 소득 창출”
“노인 일자리로 노인 빈곤 해소” 등의 구호 속에 드러나듯,
어려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우등생, 모범생 칭찬),
커서는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성실‧모범 노동자),
심지어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며 ‘노동 아니면 죽음’을 외치는 것 등의 현상이 생기게 된 배경이나 과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특히 맨 뒤에 나오는, ‘노동의 신성함’이나 ‘노동 아니면 죽음’이라는 구호들은 사실상 나치 수용소의 구호나 오늘날 노조가 외치는 구호들이 가진 ‘뜻밖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노조나 나치가 그 출발점은 완전 반대일지라도 자본의 관점에서 노동을 보면 놀랍게도 수렴하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컨대, 이 절묘한 아이러니는 ‘자본의 내면화’ 내지 (그 연장선으로서의) ‘노동의 내면화’가 낳은 산물이다.
자본주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의 관점에서 자본 내지 (자본을 위한) 노동은 매우 낯선 것(폭력)이었다. 그것이 지난한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 심지어 매우 신성한 것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난 셈이다.
그렇다. 노동과 우리네 삶을 동일시하는, ‘노동의 내면화’는 과연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크게 보아, 세 단계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첫째, 공포: 토지나 농촌에서 분리된 사람들, 방랑자, 규율 노동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주하는 이들, 노동 거부나 노동 저항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국가 폭력과 동시에 노동규율 강제가 일어났다. 15세기 이후 인클로저 운동으로 땅으로부터 추방된 이들을 노동으로 밀어 넣기 위해 구빈원이 나왔고, 유혈입법이 나왔다. 나치 시절의 집단수용소는 그 연장선이다.
둘째, 물질: 분업화, 기계화와 더불어 ‘정상적으로’ 노동을 성실히 수행하는 자들에 대한 임금 인상, 승진 등 ‘합리적’ 보상과 동시에 ‘노동권’ 보호 및 규제가 동시 다발적으로 행해졌다. 처음에 노동을 거부하며 탈주했던 자들이 탄압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생존의 두려움으로 인해 적응하기 시작했고, 일정한 물질적 보상과 생활 개선은 그 적응 행동을 더 한층 강화했다. E. P. 톰슨이 강조했듯, “노동 자체에 대한 투쟁이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으로” 변해갔던 배경이다.
셋째, 인정: 일 잘 하고 말 잘 듣는 ‘성실한 근로자’를 칭찬, 인정, 숭배하는 조직적, 사회적 분위기가 조장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보다 그 사람의 성과를 통해 존중받는다. 노동이 자존감의 원천, 정체성의 원천이 되는 셈이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강조되었고, 종교에서는 16세기 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프로테스탄티즘) 이후로 ‘노동을 통한 구원’이 일관되게 강조된다. 19~20세기 들어 과학적 관리와 포디즘의 시대를 거쳐 마침내 우리는 일(노동)이 마약과 같은 기능을 하는, ‘일중독 사회’에 살게 되었다.
얼굴만 바꾼 자본주의에서 일에 중독돼 사는 삶
그런데 자본주의는 세력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띤다.
자본주의의 폭력적 형태, 자유적 형태, 복지적 형태, 친환경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졸저, <부디 제발>, p.105 참고)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자본주의의 폭력적 형태가 자유적 형태로 변모한 것을 흔히 ‘민주화’라 하지만, 이는 통치자를 군부에서 민간으로, 간접선거를 직접선거로 바꾸는 등 약간의 제도 변화를 뜻할 뿐, 자본주의를 민본주의(민주주의)로 바꾼 건 아니란 점이다.
자본주의는 얼굴만 바꿨을 뿐 그 몸통은 여전하다!
여당이 야당 되고, 야당이 여당 돼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의 내면화를 넘어 노동 중독, 일중독, 과로사의 시대에 산다.
이제 노동은 화폐, 상품과 더불어 중독물이 되었다.
기업들은 중독물을 제공하고 국가는 혈세를 거둬 우리의 ‘중독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잘 돌아가게 여건 조성을 하며, 일반인들은 중독 시스템 안에서 ‘성실한 근로자’로 사는 걸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참된 자유와 해방의 돌파구는 어디에?
중독 시스템 안에서 과연 여유롭게 살 권리를 찾는 건 가당키나 한가?
혹시 ‘필경사 바틀비’는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걸까?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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