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원작가 ‘한강’ 개입, 한국문학 번역과 세계화에 도움이 될까

닭털주 2024. 1. 10. 18:54

원작가 한강개입, 한국문학 번역과 세계화에 도움이 될까

입력 : 2024.01.09. 19:58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얼마 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불어 번역이 메디치 외국어 상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2016<채식주의자>가 영어로 번역돼 한국소설로는 처음으로 국제적 명성의 문학상을 받았고, 그 이후 많은 작가와 번역가의 노력으로 한국문학의 위상은 국제무대에서 높아졌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발맞춰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해 8<채식주의자> 영어번역 비평 글을 출판하는 마무리 단계에서 한강이 본문인용 허락에 회의적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편집자에게서 전해 들었다.

작가가 나의 텍스트 해석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고 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한국어 원본에서 인혜가 남편과 여동생의 정사를 알고 나서도, 남편을 이해하고 자책하려 드는 답답한 순간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한 반면, 작가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저자의 의도와 다른 해석은 잘못된 것인가.

 

나는 편집자로부터 논문수정을 권고받고 촉박한 시간 속에서 노심초사하며 수정해서 제출했지만, 끝내 거부되었다.

결국 인쇄소 가기 직전 나의 글만 들어내고, <K 문학의 탄생>은 출간됐다.

책을 출판할 때, 해당 저자와 출판사가 본문인용을 허락하는 것은 통상적 관행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저자의 본문인용 불허 사건으로 우리 학계와 번역계에 적지 않은 우려를 낳을 수 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비평가의 텍스트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는 과연 타당한가.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는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한 다층적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작품은 작가의 소유지만, 출판과 동시에 공적인 영역으로 진입해 공공재가 된다. 따라서 비평가를 포함해 독자는 저자의 의도에 매몰되지 않고 텍스트를 읽을 자유와 권리가 있다.

비평은 작가 허락의 영역에 있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작품이 작가의 의도로만 이해된다면, 그처럼 지루하고 빈곤한 텍스트가 어디 있겠는가. 수백년 전 쓰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도 많은 비평이 나오고 다양한 관점을 바탕으로 무대에 오른다. 만약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그의 의도로만 해석된다면, 지금처럼 현대 관객과 활발히 소통할 수 있을까.

<채식주의자>가 저자의 의도로만 해석된다면, 글로벌 독자와 폭넓게 소통할 수 있을까.

 

둘째, 원작가의 개입은 과연 한국문학 번역과 세계화에 도움이 되는가.

랜스 휴슨에 따르면 번역비평은 번역가의 선택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평가해 새로운 번역을 준비시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작가가 번역비평을 인정하지 않는 이 사건은 한국문학 번역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국문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쓰는 번역가들에게 참담한 소식이 되는 건 아닐까 우려스럽다. 번역으로 세계에 가장 많이 이름을 알린 작가의 개입이어서 더욱 당황스럽다.

 

게다가 <채식주의자> 영어번역이 오역에도 유의미한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주장하는 글의 출간에 끼어들어, 원작가가 직접 오역논쟁에 동참하는 형국이 됐다.

오역논쟁으로 작가나 번역가가 겪었을 고초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작가가 공적인 번역비평 담론에 개입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어떤 경우라도 번역비평에 대한 원작가의 관여는 부적절하다.

 

이제 우리는 유명 작가가 본문인용을 불허해 비평에 개입하고 번역비판에 동참하는 불행한 선례를 갖게 됐다. 이와 유사한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학문공동체의 비평 시스템은 위축되고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쌓아온 한국문학의 위상에 누가 될 것이다.

이 기고문은 우려의 글로서 쓴 것이며, 공론장에서 상식적인 여론을 환기시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