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말년의 양식
입력 : 2024.12.05 20:34 수정 : 2024.12.05. 20:36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고대하던 조용필의 정규 20집이 도착한 날, 두근두근 언박싱을 하고 조심조심 CD를 꺼냈다.
볼륨을 한껏 올린 후 타이틀곡 ‘그래도 돼’를 듣기 시작했는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리듬을 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어나서 혼자서 춤을 추듯 방 안을 헤맸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는데 가사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음을 꾹꾹 눌러서 단정하고 정성스럽게 세상에 내보내는
일흔넷 조용필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절절했기 때문이었다.
위로였다.
20대, 강의실이 아니라 거리와 술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그때, 나와 친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조용필을 듣고 불렀다.
1980년 광주를 떠올리며 ‘생명’을 들었고, 감옥에 간 선배를 생각하며 ‘친구여’를 불렀다.
하지만 사실 나의 최애 곡은 트로트가 교묘히 섞인 발라드, ‘보고 싶은 여인아’였다.
청춘이란 무릇 데모를 하고 혁명을 꿈꾸더라도
다른 한편에선 사랑과 연애에 늘 빠져 있으니까.
위의 노래는 모두 4집에 실려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국적 록의 정수를 보여준 ‘못 찾겠다 꾀꼬리’,
자진모리장단을 재해석한 ‘자존심’,
그리고
“기도하는~” 다음에 터져 나오는 팬들의 환호까지 하나의 음악이 되어버린 ‘비련’도 있었다.
그래서 록, 트로트, 팝, 발라드를 넘나드는 조용필 4집은 그가 자체로 하나의 장르라는 것을 증명한 명반이었다.
엄혹했던 1980년대,
‘가왕’이라 불리던 조용필의 노래에 위로받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늘 ‘그다음’에 있는 법이다.
상상할 수 없는 성공, 그다음에 어디로 한 발 내딛느냐의 문제!
알다시피 조용필은 자신의 성공을 물신화하지 않고 나아간다.
우선 방송 출연을 끊었다.
하고 싶은 음악에 집중하고, 자신의 사운드를 표현할 수 있는 밴드에 투자하고,
라이브에 승부를 건다.
하지만 1990년대 댄스음악이 주류가 되면서 조용필은 서서히 대중에게 잊혀간다.
몇 개 음반은 완전히 망했고, 콘서트에 오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역시 삶은, ‘그다음’이다.
댄스음악이 가고 ‘빅뱅’과 힙합이 온 2013년,
조용필은 10년 만에 <헬로>라는 음반을 내놓았다.
그중 ‘바운스’는 “운이 좋게도”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한다.
그러나 1위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순셋의 그의 음악이 전혀 낡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가 ‘스타’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새삼 탐색하고,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매번 궁리하고,
100번이고 1000번이고 만들고 또 버리면서
신곡을 벼려내는 절차탁마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베토벤, 아도르노, 글렌 굴드 등의 말년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말년의 양식’이 보통 노년의 특징이라고 말해지는 조화, 화해, 포용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풀리지 않는 모순을 비타협적으로 몰아붙이면서 균열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런 긴장을 견디는 힘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망명”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조용필의 20집에 대해 평론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그의 음색이 팝이나 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고,
차라리 록 발라드 성인가요를 시도하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조용필은 바로 자신이 가장 잘한다고 알려진 그곳에서
자발적 망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음반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돼’를 반 키 정도 올려 불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한다.
그만 내려놓겠다는 깨달음과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일흔넷인 그는 여전히 동요한다.
“미치게 되면, 어쩌면, 음반을 한 번 더 낼지도 모른다”고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년 양식이, 그가 80에 하게 될 음악이 견딜 수 없이 궁금하다.
조용필. 나의 영원한 오빠이자, 나이듦에 관한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
다음번엔 필히 콘서트 현장에서 그를 만나야겠다. 부디 건승하시길!
'칼럼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통 이 정도 합니다 (6) | 2024.12.13 |
---|---|
존엄한 삶과 죽음을 위하여 (3) | 2024.12.12 |
차마 어찌할 수 없는 것들 (4) | 2024.12.06 |
인생은 아름다운가 [김탁환 칼럼] (4) | 2024.12.05 |
묵은 술, 오랜 지혜 (3) | 2024.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