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어른을 사로잡는 그림책 보실래요? -조은숙 그림책 연구자

닭털주 2022. 2. 3. 11:58

설 연휴, 어른을 사로잡는 그림책 보실래요?

 

어른들을 울리고 토론하게 하는

그림책들로 내면에 말 걸어보자

 

인도 전통미술, 나이별 잠언집에

시 그림책과 탈모 그림책까지

 

 

혹시 아시는지? 어른들이 그림책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때론 열띠게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이제 웬만한 공간에서 흔한 풍경이 됐다는 것을. 압축된 언어와 이미지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두드리는 그림책들을 보며, 새해를 자신의 내면에 말 걸기로 시작하면 어떨까?

 

 

<나무들의 밤> 표지. 보림 제공

 

<나무들의 밤>(바주 샴 두르가 바이 람 싱 우르베티 지음, 이상희 옮김, 보림, 2012)

당산나무 아래에서 새해의 희망을 기원했던 옛사람들의 경건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인도 중부 곤드족의 전통 미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숲에 살던 곤드족에게 나무는 인간의 상상력과 우주가 연결되는 매개라고 한다. 검은 재생 종이에 묘사된 나무들은 사실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며, 형광빛을 머금고 있어 신비로움이 감돈다. 예술성 높은 수제본 출판사로 유명한 인도 타라북스의 실크스크린 장인들이 그림들을 한장 한장 찍어서 묶은 판화집이다. 뒤표지에 그 책만의 고유 번호가 부여되어 있어 대량 복제물이 아닌 유일한 작품집을 소장하고 있다는 각별함을 준다. 또한 판화 작업 때 종이 표면에 묻은 잉크가 굳어서 드러난 오톨도톨한 나무 형태 선들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건드린다.

 

 

<100 인생 그림책> 표지. 사계절 제공

 

<100 인생 그림책>(하이케 팔러 글,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 김서정 옮김, 사계절, 2019)을 첫 장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면 마치 일일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온 느낌이 든다.

이 책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살면서 뭘 배우셨나요?’라는 질문을 통해 만들어진 일종의 잠언집으로, 우리의 인생을 헤아리고 되새김질을 하게 한다. 0부터 99까지 나이를 상징하는 숫자에 울림을 주는 짧은 글, 그리고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확장해주는 담백한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간된 지 6개월 만에 요즘 그림책 시장에서는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판매량인 1만부를 돌파했을 정도로 독자들의 호응도 컸던 책이다.

 

 

<흰 눈> 표지. 바우솔 제공

 

설 연휴에 나른함과 함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열어보면 좋은 책이 <흰 눈>(공광규 시, 주리 그림, 바우솔, 2016)이다. 시 그림책답게, 흩날리는 흰 눈은 하얀 매화꽃, 찔레나무 흰 꽃잎으로, 다시 할머니의 성긴 하얀 머리칼의 이미지로 겹쳐진다. 여기에 흰 눈이 어쩌면 아름답게 스러지는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닿게 되면 먹먹해짐과 함께 지금 이 시간이 지닌 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그림책의 각 화면을 시각적 상상력으로 통합시키는 연결성이다. 이렇게 형성된 강력한 이미지는 책장을 덮더라도 우리 내면 깊이 자리매김한다.

 

 

<빨간 나무> 표지. 풀빛 제공

 

한 해를 살아내다 보면,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빨간 나무>(숀 탠 글·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 2002)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헤매더라도 바로 앞에 희망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나지막하게 위로를 건넨다. 실제 많은 어른이 나를 울린 그림책이라고 고백했던 책이다. 숀 탠은 국내에도 마니아 독자층이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민자들이나 현대사회의 소외 문제에 비판적이지만 따뜻한 시선을 주는 작가이다.

 

 

<중요한 문제> 표지. 이야기꽃 제공

 

<중요한 문제>(조원희 글·그림, 이야기꽃, 2017)는 탈모가 주요 모티브로 등장한다. 탈모는 대표적인 현대인의 병.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르느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게 되는 아이러니가 묘한 위로를 준다. 그림책에 그려진 탈모의 상처는 500원짜리 동전만 한 붉은색 포탄 자국처럼 머리 위에 얹혀져 있다. 주인공은 원형탈모증을 감추느라 모자를 뒤집어쓰고 잔뜩 움츠리고 긴장한 모습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거대한 사회체제 속에서 별 효력 없는 폭탄을 지닌 채 위축되곤 하는 우리 모습의 투영이다. 설 연휴 뒤 일상으로의 복귀가 마음을 무겁게 할 때, 픽 하고 웃으며 가볍게 털어버리듯이 이 책이 주는 역설의 유머를 즐겨보자.

그 외에도 부모님의 주름살이 유난히 눈에 띄었을 때 <엄마의 초상화>(유지연, 이야기꽃, 2014), 바닥을 딛고 다시 차오르는 힘을 다짐하고 싶다면 <가드를 올리고>(고정순, 만만한책방, 2017),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린 이 겨울을 따뜻하게 할 상상이 필요하다면 <눈 아이>(안녕달, 창비, 2021), 연휴의 산책길에 식물이 보내주는 감성 신호를 더해 줄 <연남천 풀다발>(전소영, 달그림, 2018) 등을 곁들여보자.

 

조은숙 그림책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