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책읽는 노동자

닭털주 2022. 2. 5. 12:42

책읽는 노동자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농민공은 중국에서 이주 노동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농민의 자유로운 이주를 허용하지 않는 중국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나 공업 지대를 떠돌며 비합법적으로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수는 대략 29천만명쯤 된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사실상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2021년의 한 조사는 이들 중 7천만명이 이미 자기 고향으로부터 아주 멀리떨어진 곳까지 왔다고 추산했다. 이런 묘사는 다소 시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한 농민공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더우반에 글을 하나 올렸다.

그는 수년간 철학과 영어를 독학해왔으며, 4개월 걸려 <하이데거 입문>이라는 영문 책의 번역을 마쳤다고 하면서 출판 가능성을 알고 싶어 했다. 이때까지 더우반의 하이데거 방은 회원 2만명가량의 한적한(중국 기준으로) 곳이었다. 첫 반응은 글이 진짜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내용에 문체도 노동자가 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어진 반응은 현실적인 것으로, 학계나 출판계에 연줄이 있지 않은 한 출간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4개월간의 고투가 허망하게 정리될 무렵,

이 사연이 소셜네트워크에서 뜻밖의 화제가 되면서 하이데거를 읽는 농민공은 중국인들의 열렬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인민일보>는 기사에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기사들을 종합하면

첸지(필명)30대 초반의 남성으로, 10여년 전 형편상 대학을 중퇴한 뒤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노동에 종사해왔다. 매일 12시간 노동 후의 무력감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후 철학, 특히 하이데거에 매료되었다.

그는 일터에서는 철학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하이데거가 예로부터 사회주의권에서 언제나 인기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냉전 시절과 달라진 점은 당국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이런 비정치적 철학에 호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첸지 이야기는 지구를 반바퀴 돌아 철학자 지제크에게까지 도달했다.

지제크는 서구인들이 즉각 떠올릴 수 있는 반응이 다음 두가지일 거라고 말한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으로, 첸지 같은 노동자가 자기 현실을 깨닫고 이를 타파하는 데 하이데거는 좋은 도구가 아니라는 것.

또 하나는 시사적인 비판으로, 하이데거는 마지막 유고가 공개되면서 완전히 반유대주의 나치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그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지제크는 두 비판을 다 기각하며 첸지의 선택을 옹호한다.

하이데거가 최고여서가 아니다. 적어도 서구인들처럼 자기가 아는 이론과 상식으로 뭐든 간단히 처리하는 것보다, 첸지처럼 자기 삶의 자유를 찾기 위해 철학을 추구하는 태도가 훨씬 훌륭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제크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요지는 그가 뭘 읽든 넌 신경 쓰지 마라는 게 아닐까?

첸지가 가진 핸디캡(지적이든 경제적이든)은 참견쟁이들을 모여들게 하는 좋은 조건이 된다. 그에게 적합한 책은 따로 있다며 높은 위치에서 나무라는 이 사람들은 지제크가 서구인이라고 부른 유형이다. 경제적인 욕망도 네 처지에 맞게 가지라고 충고하는 세상에서 독서에 관한 참견쯤이야 애교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더 추락한 성인 독서율 통계가 발표되었다.

책 안 읽는 이유는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1위였고, 소득이 낮을수록 독서율도 낮았다.

노동과 가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책과 멀어지게 하는 이유들이

첸지의 경우에는 반대로 책을 집어 들게 했다.

삶이 이런 식으로 끝나는가 하는 두려움에 펼친 하이데거 책에서 첸지가 뭘 봤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