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최재봉의 탐문 _07 독자 -후원자인가 하면 독재자인, 독자

닭털주 2022. 2. 9. 13:34

후원자인가 하면 독재자인, 독자

 

최재봉의 탐문 _07 독자

 

 

글은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하지만 독자에게 읽힘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와 독자는 상보적인 관계에 놓인다.

모든 작가는 독자에서 출발한다.

글을 쓰기 전에 읽는 일이 먼저다. 읽는 일이 쌓이고 쌓인 끝에 쓰는 일로 몸을 바꾼다.

독자로 출발해 작가가 된 뒤에도 독자로서의 정체성은 언제까지고 그를 따라다닌다.

모든 작가는 곧 독자이기도 하다.

 

시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정현종의 시집 <나는 별아저씨>(1978) 맨 앞에 실린 작품 불쌍하도다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는 시를 쓰는 행위와 남들에게 읽히는 행위 사이에 위계가 분명하다.

시를 쓰는 일이 순수하고 자족적인 가치를 지니는 반면, 그것을 남들에게 읽히고자 발표하는 일은 불순하고 부차적이며 구차한 짓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글쓰기에서 독자란 다만 무시해도 좋은 곁다리일 뿐일까.

 

글은 다른 무엇에 앞서 자아의 표출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은 우선 쓰는 이 자신에게 의미를 지닌다. 일기가 단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온전히 자족적이며 독립적인 글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누군가가 읽을 가능성이 전무하다 해도 사람은 과연 글이란 걸 쓰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글의 도구인 언어부터가 사회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누군가 들어주고 읽어줄 사람을 겨냥한다(심지어는 일기조차도 독자를 상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쓰는 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읽지 않을 일기라 해도, 그것을 쓰는 는 역시 독자를 겸한다고 보아야 한다).

글이란 오로지 어떤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라고 움베르토 에코도 어느 글에서 말했다.

그는 나아가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쓴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까지 단언했다(<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글은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하지만 독자에게 읽힘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와 독자는 상보적인 관계에 놓인다.

모든 작가는 독자에서 출발한다. 글을 쓰기 전에 읽는 일이 먼저다. 읽는 일이 쌓이고 쌓인 끝에 쓰는 일로 몸을 바꾼다. 양질전환의 법칙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독자로 출발해 작가가 된 뒤에도 독자로서의 정체성은 언제까지고 그를 따라다닌다. 모든 작가는 곧 독자이기도 하다(뒤집어 말하자면, 모든 독자는 잠재적 작가라 할 수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문호 보르헤스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독자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읽었던 것이 내가 썼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겸손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읽지만, 누구든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쓰기 때문이라는 것(<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논리가 아닌가.

독자는 여러 얼굴을 지닌다. 가장 흔한 것이 숭배자와 후원자라 하겠다. 많은 경우 독자는 작가와 작품을 흠모하며 떠받들고 책을 구매함으로써 작가의 경제에 도움을 준다. 작가가 나오는 독자와의 만남행사를 찾아다니며 작가의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하고 박수 치는 모습은 연예인 팬클럽 멤버를 닮았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에는 전체 10권짜리인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한 개인과 단체의 필사본 52벌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역시 작가와 작품에 대한 흠모의 표현이라 하겠다.

연예인의 극성팬이 때로 스토커로 변신하는 것처럼, 작가를 흠모하는 열성 독자가 스토커나 독재자로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연작소설집 <작가 소설>에 실린 단편 사인회의 우울에는 책 속의 오류를 시시콜콜하게 지적하거나, 넌지시 표절 혐의를 제기하는가 하면, 작품 주인공이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망상을 드러내는 등의 진상독자들이 등장한다. 기리노 나쓰오의 장편소설 <일몰의 저편>에서 성애와 폭력을 즐겨 묘사하는 작가를 소환한 문화문예윤리향상위원회라는 기구는 독자의 고발을 소환의 근거로 제시한다.

명탐정 셜록 홈스를 창조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가 아서 코넌 도일이 마지막 사건이라는 제목을 단 단편에서 홈스를 폭포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가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못 이겨 10년 만에 되살린 일화는 독자가 작가에 대해 지니는 무시 못할 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미저리>에서도 작가인 폴 셸던은 귀족 남성과 결혼해서 신분 상승을 이룩한 고아 출신 여자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펼쳐지는 연작” ‘미저리로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어느 순간 그 연작에 싫증이 나서 주인공을 죽임과 동시에 연작 역시 마무리한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 그를 제집에 데려가 가둔 열혈 독자 애니 윌크스는 폴로 하여금 죽었던 주인공을 되살려 <돌아온 미저리>라는 작품을 쓰도록 강요한다. 폴의 넘버원 팬을 자처하는 애니는 그가 처음에 마지못해 쓴 원고를 퇴짜 놓는 등 편집자 역할까지 수행하며 그가 나만을 위한 책을 쓰도록 독려한다. 애니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었다고 할 수도 있을 이 소설 속 소설이 또 하나의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이 <미저리>의 결말이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단편 독자에는 독재 국가의 검열관인 독자가 등장한다. 주인공 돈 알폰소는 단 한 건의 실수도 없이 20년의 연륜을 쌓은 사람”. 그가 하는 일은 출판을 앞둔 원고를 미리 제출받아 읽고 출판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가 어느 날 손에 든 원고는 서기 8000년경의 가상적인 독재 정권기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으로, 현실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어서 당연히 출판 불가 판정을 내려야 할 터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돈 알폰소가 작품에 푹 빠진 것이다. “산문의 부드러운 감흥”, “그 속의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소리 나는 방식과 사랑에 빠진 듯 유연하고 감각적이며 놀라운문장에 매료된 그는 검열관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 나아간다. 신분을 감춘 채 원고를 쓴 작가와 그 가족을 만나고, 결국 자신의 권한으로 책의 출간을 허가하며, 상관의 지시를 거역하고 정부에 맞서는 이들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올해 대산문학상을 받은 차근호의 희곡 <타자기 치는 남자>는 저 엄혹했던 80년대 초 반공 이념으로 똘똘 뭉친 정보과 형사가 책을 읽으며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는 점에서 도르프만 소설 독자를 떠오르게도 한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받겠다며 글짓기 학원을 찾은 형사 경구에게 교사 출신 학원장 문식은 우선 책을 읽을 것을 권하고 책들을 추천한다. <죄와 벌> <부활> <맥베스> 같은 문학작품은 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분석학 입문>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철학서와 사회과학서가 차례로 독서 목록에 오른다.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이 책들을 읽은 경구가 의식화 과정을 거쳐 민주화 투쟁 전선에 나서는 결말은 역시 도르프만의 독자를 닮았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만한 놈들이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차렷, 헤쳐모엿!// ×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황지우와 함께 80년대 해체시 흐름을 주도했던 박남철의 첫 시집 <지상의 인간>(1984)에 실린 시 독자 놈들 길들이기앞부분이다. 시만큼이나 일상에서도 특유의 분방과 똘끼’”(작고한 평론가 황광수의 표현)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그다운 시라 하겠다. “차가운 작가는 독자들이 싫어한다며 다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같은 데서 살갑게 팬 서비스를 하”(<일몰의 저편>)는 요즘 분위기에서는 지난 시절 박남철이 위악적으로 표출했던 작가의 자존과 고집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냉탕과 열탕처럼 극과 극을 오가는 작가와 독자의 사이.

그 적정한 거리와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올해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이문재 시인의 수상 소감을 참조해 보면 어떨까.

시인이 완성한 시가 모두 좋은 시는 아닙니다. 시인이 완성한 완벽한 시는 대부분 독자의 개입을 차단합니다. 이때 시와 독자는 수직적이고 일방향적인 관계에 놓입니다. 이때 독자는 2차적 존재입니다. 요즘 제가 쓰려고 하는 시는 덜 쓴 시입니다. 독자에게 여지를 남겨놓는 미완의 시, 독자가 새로 쓸 수 있도록 촉발하는 열려 있는 시, 그리하여 시가 독자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독자 자신은 물론 시와 시인에게도 축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