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가로수 가지치기

닭털주 2022. 2. 14. 17:38

가로수 가지치기

최민영 논설위원

 

 

서울 마포대교 남단 윤중로의 가로수들이 과도한 가지치기로 기둥만 남은 1995년의 풍경. 최근 들어 이같은 행정편의적인 가지치기 관행에 대해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지치기는 해를 향해 무성히 뻗으려는 나무의 본능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길들이는 작업이다.

가지치기를 뜻하는 영어 ‘pruning’의 어원은

둥글게 다듬어진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rotundus’. 농경만큼이나 오래됐다.

4500년 전 요르단의 올리브농장 유적에서는 나무를 다듬는 손바닥 크기의 돌칼이 발굴된 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포도나무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성장통으로 묘사한다.

나무는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에 낙엽 지고,

겨울에 휴면하는데 가지치기는 이때가 제철이다.

가지 많은 나무보다는 빛과 바람이 잘 통하는 나무가 잘 자란다.

가지치기를 할 때는 병든 가지가 1순위다.

광합성을 하지 못해 죽은 나뭇가지는 나무의 흉터인 옹이가 되므로 자른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거나 맞닿은 가지도 마찬가지다.

나무와 평행하게 위로 뻗는 가지도 바람직하지 않다.

꼭대기 자리를 놓고 두 가지가 경쟁할 때는 튼튼한 하나만 남겨둔다.

너무 낮거나, 기둥을 향해 난 가지도 잘라낸다.

나무로서는 말 그대로 뼈를 깎는스트레스다.

잘못하면 뿌리까지 세균이나 곰팡이, 박테리아에 감염돼 죽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봄을 앞두고 가로수 가지치기가 시작된다.

사지를 잃고 몸통만 남은 가로수가 줄지은 모습을 올해도 보게 될까 걱정이다.

굵은 가지까지 쳐내는 이 같은 ()전정이 세심하게 다듬는 ()전정보다 손은 덜 가는데 품셈은 더 높다고 한다.

도심 교통표지판이나 신호등, 전깃줄 같은 필수시설 관리가 가로수보다 우선인 탓도 있다.

간판을 가린다거나 낙엽이 배수로를 막아 귀찮다는 민원 때문에 나무가 닭발 모양으로 잘리기 일쑤다.

이익과 효율을 위해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와 다르지 않다.

 

도시생태계의 약자인 나무는 인간처럼 항변도 못하고, 동물처럼 도망도 못 친다.

그 수난을 겪고도 기어코 새로운 가지들을 뻗어내는 생명력은 경이롭고도 애처롭다.

빛공해에 시달리면서도 계절마다 신록과 그늘, 단풍을 아낌없이 내주고 미세먼지를 흡착하고 도심의 온도는 낮춰주는 나무들이다.

포도나무 가지치기 달인인 한 이탈리아인은 자신의 비법을 나무에 대한 존중이라고 했다.

가지치기가 벌목이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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