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양희은의 어떤 날] 목소리는 낮게, 구두는 가볍게

닭털주 2022. 3. 4. 11:07

[양희은의 어떤 날] 목소리는 낮게, 구두는 가볍게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기운이 떨어져 머릿속도 텅 비고 도무지 참신한 그 무엇이 떠오르지 않아 하는 일이 제자리걸음일 때, 다들 어떤 방법으로 늪에서 벗어나는지 궁금하다.

오래전 태릉선수촌 동년배들과 슬럼프 극복하는 각자의 경험을 나눈 적이 있다.

쉬는 날에도 혼자 나와 안되는 부분을 죽어라고 연습한다는 친구,

아니면 거리를 두고 슬렁슬렁 무심하게 딴짓하며 보낸다는 친구,

내 경우는 그 두 가지를 다 한다.

날으는 작은 새국대 조혜정 선수와는 아시아 사람 하나도 없는 이탈리아 안코나에서 둘이 지낸 시간이 있고 서로 의지한 우정도 깊었다. 배구 경기가 있을 때마다 소도시 여러 곳을 함께 여행했는데 자기는 배구공에 마음을 실어 원하는 자리에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 실수 없이 빈자리, 상대의 허점으로 공이 간단다. ! 대단한 염력+공력 아닌가?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마음 기댈 수 없이 유난히 빡빡한 분위기! 객석 위의 공기가 차가울 때 내게로 향하는 얼굴이 눈에 띄면 암전된 객석 가운데서 내 눈을 맞추는 어떤 이의 마음속으로 노래를 보낸다.

제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사연으로 공연장에 와서 공간을 채운 이들이 만드는 분위기는 그 머리 위의 허공이다. 그것은 매일 다르다. 어떤 날은 힘 안 들이고 노래가 그 공간을 채우는데, 흐름 없이 고여 있을 때는 사실 진땀이 뽀작뽀작 난다. 더워서 줄줄 흐르는 땀이 아닌 끈적한 땀이다. 어쩌든지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품에 품고 마음을 다해 분위기를 내 것으로 만들어 안아서 흘러가야 한다. 나를 향한 눈빛이 유일한 응원이니까 거기에 기대지 않으면 실마리가 안 풀린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파장에 응답하듯 기운이 모여 힘들이지 않고 끝까지 간다.

힘을 뺀 채 노래할 수 있다. 용을 쓰지 않아도, 진땀 흘리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 나오는 광고나 노래의 마스터링 기술도 장족의 발전을 해서 최첨단이지만 그중에는 유난히 큰 음량으로 출시된 것들도 있다. 기술감독이 볼륨을 올릴 때 표준에 맞추면 크게 튀어나오는 소리비슷비슷하면 묻히니까 남달라야 귀를 잡아끈다는 계산에서일까? 작은 소리보다 내지르는 소리가 관심을 끌어서일까?

늘 이어폰을 꽂고 일하는 우리에겐 낮고 부드러운 음색이 신기하게 더 잘 들린다.

실지로 귓속말이 제일 강한 소리라는 설도 있다.

내레이션 음성 중에는 <교육방송>(EBS) 프로그램 <건축탐구>의 김영옥 선생님이 힘 다 빼고 하시는 그 톤이 너무 귀하고 가슴을 울릴 때가 있다.

그분의 음성과 음색이 좋아서 프로그램도 놓치지 않고 보는 편이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 점심을 먹는데 일하던 친구들도 은퇴한 뒤 열심히 나온다.

출석률이 좋다. 모이면 낡은 집 수리와 짐 정리, 식구들 건강 문제, 남편 모시고 병원 순회 중인 얘기, 본인의 퇴행성 관절염, 임플란트, 신장투석, 코골이 무호흡증과 양압기 사용 등에 대한 경험을 나눈다.

남의 편이 의사의 권고나 아내의 도움말을 일체 무시하며 제멋대로라 속상하다는 하소연,

버릴 수 없는 귀한 것들을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할지,

딸이나 며느리가 요새 흐름에서 한참 벗어난 살림살이를 기꺼이 고맙게 받을지 고민이라는 얘기.

정리 중에 가장 번거로운 것으로 앨범 사진 정리, 책 정리가 꼽힌다.

옛날 앨범의 투명 쩍쩍이를 들추어 일일이 뜯어내고 분류해 종이상자에 정리하기, 아이들 어린 날 사진이 꽤 많던데 며느리에게 건네면 자기 가족사진 아닌데 뭐 흥미를 가지겠냐?

옷은 더 이상 됐다, 무얼 더 사겠냐, 얼마나 입겠다고?

명품백도 됐다, 그저 가벼운 게 최고더라, 구두는 밑창이 부드럽고 탄력 있는 게 좋다.

굽이 낮아야지. 염색은 어떻게 하니? 등등.

모임은 서넛 정도가 알뜰하다.

두루 얘기 나누고 필요한 정보도 얻고 속상한 얘기들 끝에 편들어주고 뭐든지 한번에 안 끝난다는 푸념도 하고, 챙긴다 해도 뭔가가 또 빠져 있어 집에서 나올 때도 두어번 들락날락한다며 다들 웃는다. 킥킥거린다.

마트에서 쌀 사려는데 옆에 다른 품목 담당자가 어르신이라며 카트에 쌀을 실어주더라. 어르신 소리 아직 좀 어색한데 이제는 좋게 받아들이려고. 우리 마음은 청춘인데 노인, 어르신 아무러면 어떠니? 고집 센 꼰대라도 좋아. 건강만 하자, 우리!”

2월 하순을 꽃샘추위 속에 보낸다.

한 달이 2월처럼 28일로 짧게 끝나면 월급도 일년에 13번을 받을 수 있는데ㅋㅋ.

삼일절 지나면 바야흐로 새 학기 시작이다.

챙겨야 할 거리도 많겠다. 한번에 안 끝날 테니 메모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