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선량한’ 시민은 어디에 사는가

닭털주 2022. 4. 10. 18:58

선량한시민은 어디에 사는가

 

조해진 | 소설가

 

 

최근 국민의힘 당대표가 지하철역에서 시위를 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향해 선량한 시민의 불편을 야기한다는 식의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내 머릿속에선 그가 선택한 선량이란 단어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동권이라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승강장을 시위의 공간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들을 보며 불편을 느끼고 때로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는 이준석 대표 식의 선량한이란 대체 어떤 성질의 형용사인 것일까.

거주지 근처에 이른바 혐오시설이라는 요양원이나 납골당이 건설되는 것에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준석 대표가 규정한 선량한시민들에 포함될지 모르겠다.

가상의 행정구역인 서영동의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하는 조남주의 장편소설 <서영동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소설에는 아파트를 통해 자산을 증식하려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아파트 주변에 치매 관련 시설이 건설된다는 소식에 입주민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사를 방해하는 장면은 현실에서도 빈번하기에 꽤나 익숙하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유가족이 등장하는 배삼식의 희곡 <먼 데서 오는 여자>(<3월의 눈>)도 연이어 상기됐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와 그런 아내 곁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유도하며 과거를 소환하는 남편, 그들에게는 대학 신입생이 되자마자 지하철 안에서 까맣게 죽은 딸이 있다. 작품 끝에 이르면, 이 비극적인 참사를 추모하는 공원을 마련하기까지의 지난했던 과정과 주민들의 반대로 시신을 추모 부지에 몰래 묻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연이 나온다.

이 사연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을 작가가 작품에 가져온 것이다.

현재 대구에 있는 시민안전테마파크’(‘추모애도라는 이름은 끝내 붙지 못했다)는 지하철 화재 참사를 계기로 만들어졌지만 유가족을 진정 위로해줄 수 있는 희생자의 묘지와 위령탑은 이곳에 떳떳하게 들어서지 못했다.

혐오시설(이라 쓰지만 필수시설이 맞다)로부터 편의와 안전, 나아가 자산을 보호하려는 우리 선량한시민들의 이런 몸부림은 꾸준히 이어져왔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올해 초 청량리역 일대에서 34년째 밥퍼나눔운동을 해온 다일복지재단 최일도 목사가 서울시에 고발당했는데, 그 발단은 청량리에 재개발 바람이 불고 집값이 오르자 일부 주민들이 주변 시세를 떨어뜨리는 이 재단 건물을 철거하라고 민원을 넣으면서였다고 한다. 물론 각자의 편의와 안전, 자산은 중요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혹은 누군가의 아픔을 차단하고 배제하며 지키는 그 모든 가치는 인간적인 것일까. 더욱이 그 차단과 배제의 태도가 시설을 넘어 장애인에게도 적용되고 있으며 정치인마저 그 현상을 견인하고 있는 현실이 나로서는 절망이 아닌 다른 단어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국외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은 외국에서는 휠체어 이용자와 안내견에게 의지한 시각장애인을 한국에서보다 자주 보게 되는데, 그만큼 한국의 장애인들이 외출을 삼가기 때문일 거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한국에서 장애인들이 유독 보이지 않는 건 그들이 겪는 불편이 큰 이유겠지만 그 불편을 다시 불편해하는, 그러니까 선량한’, 선량하면서도 비정한 비장애인들의 시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폴란드에서 한국어 강사를 하던 시절, 몇번인가 공동묘지로 산책을 갔다.

내 기억에 전차로 20분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묘지는 그야말로 공원과 다를 게 없어서 나 같은 산책자들이 스스럼없이 그곳을 오갔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머무는 동안엔 버스기사가 휠체어를 이용하는 승객의 탑승을 도울 때마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그 시간을 기다려주는 일이 아주 흔했다. 그때는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부러운 마음으로 그날들을 가만히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