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메타 한밤중에 하늘 바라보기

닭털주 2022. 6. 6. 07:14

메타 한밤중에 하늘 바라보기

 

오늘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디지털 패러다임은 오히려 인류가 다른과학 기술을 창의적으로 개발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걸림돌일 수 있다. 우리가 인간 능력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면, 새로운 길을 항상 모색하고 있어야 한다. 디지털 문명의 발달이 몇십년 후에 특이점에 이를지 임계점에 이를지 지금 우리는 잘 모른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메타라는 말의 사용 빈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

메타(meta)는 고대 헬라스어에서 유래해 많은 서구어에 퍼진 접두사다. 통상 다른 말 앞에 붙여서 신조어를 만드는 데 활용한다. 메타데이터, 메타메모리처럼 서구어끼리의 조합도 있지만, 메타언어, 메타비평 등 이종 혼성어들도 많다. 디지털 문명이 대세가 되면서 생겨나는 조어들은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메타자본, 메타방역, 메타사피엔스 등이 그렇다.

요즘 최고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메타버스도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로 유명한 기업의 이름도 메타’(Meta Platforms)로 바뀌었다. 가히 메타를 앞세운세상이다.

메타라는 접두사를 사용한 조어의 원조는 우리가 형이상학이라고 옮겨 쓰는 메타피지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산책하며 대화하고 강론했기 때문에 그의 학파는 소요학파라고 불렸다. 기원전 1세기에 학파의 수장이었던 안드로니코스는 학파 내부용 강론 자료들을 정리 편집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연학’(physika) 또는 물리학 저술들 다음에’(meta) 14권으로 구성된 일련의 저술들을 배치했는데, 이후 그 저술들을 메타피지카라고 총칭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형이상학에 해당되는 분야를 프로테 필로소피아으뜸 철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메타피지카라는 말은 뭔가 그윽한 느낌을 주고 매력적이어서 오랫동안 학술 분야에서 회자되어왔다.

 

다른 한편 메타피지카라는 용어가 안드로니코스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소요학파 내에서 누군가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는것에 대한 탐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메타피지카라는 말에서 메타는 두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술 편집 순서이자 학문 연구방법의 순서라는 관점에서 다음에라는 뜻과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는것에 대한 탐구라는 뜻 모두를 갖게 되었다. 사실 이 두 의미는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 함축적이다.

오늘날 메타라는 접두사를 써서 말을 만드는 경우는 매우 다양해졌다.

기본적으로는 메타피지카라는 술어가 탄생하면서 생긴 의미를 어느 정도 물려받았다.

일정 단어에 다음에또는 넘어서라는 의미를 부여할 때 그 접두사를 붙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예를 하나 들면, 메타비평은 어떤 작품에 대한 비평 다음에오는 것이기도 하고 그 비평을 넘어서는이기도 하다.

비평에 대한 비평, 곧 작품 비평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비평의 논리나 이론의 적용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는 비평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창 관심을 받고 있는 메타버스는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기술적 수준에서 아바타를 통해 실제 현실과 같은 사회 경제 교육 문화 과학 기술 활동을 할 수 있는 3차원 공간 플랫폼이라고 사전에서 거칠게 정의하고 있는 메타버스는 메타와 유니버스의 합성어다. 그런데 여기서 메타는 그것에 바로 붙은 말인 유니버스를 넘어선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접두사 메타에 이어 붙을 말은 현실인 것 같다.

현실을 넘어서는 유니버스라는 뜻인 것 같다.

현실을 넘어서는 세상은 또 하나의 현실일 듯싶은데, 이런 의미에서 탈현실의 일상화를 가져오는 것일 듯싶다. 앞으로 디지털 문명에서 이것이 대세가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바꿀 것이며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득을 창출할 것이라고 한다.

나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아직은 헤드셋을 사용하는 등 기술적으로 인간의 시각 사용을 극대화하는 과정에 있는 좀 허접한 수준일지라도, 아주 먼 미래에 현실의 우리 몸과 메타버스의 아바타가 생리적 분자 수준에서까지 동일화되는 경지를 향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세포를 분자 수준까지 스캔해 메타버스의 공간에 전송하든가, 분자적 순간이동 기기를 활용해 다양한 메타버스의 세계를 여행하는 경지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어탐방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면,

메타버스의 메타는 접두사의 의미라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그 접두사가 유도한 세계의 역할은 전도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형이상학이라는 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 원리를 탐구해서 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리학도 그 자체로 메타물리학적인 지향점을 내포한다. 우주가 존재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우주를 총제적으로 인식하는 빅뱅이라는 설명 모델을 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 세상을 근본에서부터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일상 현실을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탈현실화가 아니다. 이는 쓸데없는 호기심이라는 핀잔을 듣더라도 우리가 광활한 우주를 인식하게 되면서 은하와 태양계를 알게 되고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 같은 지구의 일상 현실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다른 차이점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이상학적 태도는 시선 돌리기에 있다.

이 땅의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메타물리학적 태도는 탈레스처럼 한밤중에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때론 아예 시선을 차단하는 데에 있다.

일상의 모순과 갈등을 깨닫기 위해 눈을 감고사색에 잠기는 것이다.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명의 특징은 인간 뇌의 작동 원리를 이용하고 인간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에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사이버 공간에 이동(또는 이주)시키는 데에 있다.

재런 러니어는 이런 사이버 전체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그는 가상현실(VR)을 개념화하고 상용화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인류 문명의 균형 감각 상실을 우려한다. 디지털 패러다임이 우리 삶과 현실을 이해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하고 완벽한 길임을 주장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더 나가면 오늘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디지털 패러다임은 오히려 인류가 다른과학 기술을 창의적으로 개발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걸림돌일 수 있다.

시선을 돌릴 여지를 주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인간 능력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면,

새로운 길을 항상 모색하고 있어야 한다.

디지털 문명의 발달이 몇십년 후에 특이점에 이를지 임계점에 이를지 지금 우리는 잘 모른다. 지금 대세를 이루며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메타적 사고는 항상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