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한겨레와 박원순 사건, '진실에 대한 2차 가해’

닭털주 2023. 6. 30. 22:55

한겨레와 박원순 사건, '진실에 대한 2차 가해

 

이명재 에디터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첫 변론'7월 개봉 계획이 잡힌 것에 대해 한겨레신문이 ‘2차 가해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면서 이를 철회하라고 29일 사설을 통해 요구했다.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인물의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겐 잊고 싶은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라는 이 사설은

이 다큐의 내용에 대한 반대를 넘어서서 개봉 자체를 저지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준다.

기사도 아닌 사설을 쓰면서까지 재차 내놓은 한겨레의 논지는

'박원순 사건'에 관한 한 한겨레의 일관된 시각을 거듭 확인시켜주는 것은 물론

그 논지가 더욱 심해지고 더욱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논지는 단순화해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결론은 이미 내려졌으니 그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체의 항변도 제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질문의 원천봉쇄에 다름아니다.

 

여성이라는 성별에서의 사회적 약자,

특히 '성적 비행'의 피해자에 대한 존중과 보호라는,

'약자 대변지'로서의 한겨레의 확고한 믿음과 원칙은 한겨레의 존재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단 평가할 만하다.

성범죄 관련 사안에서 피해자 중심주의, 사건의 성격상 피해자의 발언과 주장에 가중치를 두는 것은 이 사안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상당한 합의에 도달한 원칙이다.

그러나 그 원칙이 '피해자 중심주의''진실 탐색'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이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른 가치를 희생시키는 것이 될 뿐이다.

사실은 둘 중 어느 한쪽이 없이는 다른 한쪽도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다른 쪽의 질문과 주장의 봉쇄 방식으로는

미투 운동이든, 또 그것을 페미니즘의 한 실현이라고 하든

그 논의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스스로 막는 것이 될 뿐이다.

 

박원순 사건에 대해 한겨레가 얘기하는 것이 있고 얘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한겨레의 지면에서 한편의 주장과 사실들은 다른 편의 주장과 사실들의 위에 군림한다.

절대 우위 정도가 아니라 발언권은 거의 한편에만 있어 왔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곧 모든 주장과 사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독점'돼야 한다는 것이어선 결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진실', 최소한 진실에로 접근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해 2, 3차의 가해를 입히는 것이다.

 

첫 변론제작에 참여하고 지지해 온 이들은

이 다큐의 개봉이 박원순 사건의 사실관계를 밝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법원과 국가인권위원회의 판결을 인용하면서 다큐의 주장은 인권위의 조사 결과와 법원 판결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반대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법원이든 인권위든 어떤 기관의 판결과 결정이

어떤 사안에 대한 논의의 종지부가 될 수는 없다.

한겨레 자신이 숱한 법원의 판결에 대해 비판하고 의문을 던지고 있잖은가.

 

그 제목이 말하듯 이 다큐는 제대로 된 '' 변론을 이제 시작해 보겠다는 것이다.

지금껏 없었던 '질문다운 질문'을 제대로 던져 보겠다는 것이다.

박원순 다큐도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제기하는 것은

한편의 진실에 대해 다른 편의 진실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들이 제기하는 것은 "이것이 단 하나의 진실이다"가 아니라 "다른 진실이 있는지 찾아가 보자"는 것이다.

이 다큐도 그렇지만 박원순 사건의 진실 탐색은 종지부를 찍을 때가 아닌 것은 물론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제대로 해 보는 것을 막아 왔던 것에 한겨레 자신이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위 결정과 법원의 판결이 나왔으니 입을 다물라고 한겨레는 얘기한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이들이 입을 다물어야 했기에 그같은 결정과 판결이 나왔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원순 사건에서 한겨레가 얘기하듯 인권위의 결정이든 법원의 판결이든

그와 함께하는 이들의 주장은 분명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진실인 것이며, 유일무이한 진실일 수는 없다.

진실의 이름으로 다른 진실로의 길을 막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그 한편의 진실 자신마저 반()진실이 되고 만다. 스스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오히려 허약하게 만들 뿐이다.

 

어떤 가치를 지키려 할 때 빠지지 않아야 하는 함정의 하나는 그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 알베르 까뮈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나는 문학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이 결코 유일무이한 가치인 것은 아니며 다른 어느 가치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듯

어떤 가치와 추구에 유일절대성을 부여할 때 그것은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그 가치를 오히려 훼손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페미니즘이 그런 오류에 빠진다면

그것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오히려 반() 페미니즘이 돼버리는,

최소한 반쪽 페미니즘이 돼버리고 마는 역설도 그렇다.

 

이번 사안에 대한 논의가 반쪽이 되지 않으려면 '2차 가해'라는 용어에 대해서부터 경직된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말은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전제하는 것인데,

그러나 어떤 사안이든 간에 강자와 약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도 하지만

특히 박원순 사건에서 강자와 약자의 위치는 더욱 그렇다.

한편의 당사자인 박원순 시장은 자신을 항변할 수 없는 상태가 돼 있다.

그같은 상황에서 그가 전적으로, 항상 강자라고 할 수 있는가.

시장으로서 그는 강자였을지 모르지만 말 없는 고인이 된 지금의 그가 이 사안에서 여전히 강자인가. 바로 이런 물음들이 허용돼야 하는 것이다.

한겨레가 덮지 말고 막지 말아야 할 질문들이 이런 질문들인 것이다.

 

한겨레 사설은 박 시장이 살아 있다면 다큐의 개봉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라는 단언까지 하고 있다. 고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실로 대담무쌍한 주장이며 논리다.

그러나 설령 박 시장의 뜻이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이 사안이 박 시장 그 개인만의 문제인 것인가.

이 사안에 대한 질문 제기가 허용돼야 하는 것은 이 문제가 결코 박원순 개인에 대한 신원이나 그 혼자의 명예회복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투이든 페미니즘이든 그것은 결국 보편적 정의의 기반 위에서 그 성숙과 발전이 이룩되는 것이다.

그 보편의 실현에 성역은 있을 수 없다.

어느 집단이나 가치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한겨레의 창간 정신이며 지금도 한겨레에 많은 기대를 내려놓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한겨레가 보여줘야 할 모습일 것이다.

박원순 사건에 대해서부터 바로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