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이 된 학생, 인질이 된 교사
어쩌다 교육 현장이 이렇게 되었을까?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건설 현장이나 공장에서만 사람이 죽는 건 아니다.
그 ‘신성한’ 교육 현장에서도 교사가 어이없이 죽어나간다.
7월 18일 서울 서이초 새내기 교사(1학년 담임)의 죽음에 대한 애도나 진상규명이 채 끝나기도 전인 8월 31일 서울 양천구 초등학교 14년차 교사(6학년 담임)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전북 군산에서도 우연히 같은 날, 30대 초등 교사가 자살했다.
이 글을 쓰던 중인 9월 3일에도 용인의 고교 교사가 등산로 인근에서 자살했다.
연이은 교사들의 죽음, 이는 결코 한국 교육현장의 예외가 아닌, 구조적 문제를 반영한다.
우주 보살피는 천직(天職)이 왜 죽음으로 내몰리는가
교사들은 서이초 교사의 49재 추모일인 9월 4일을 ‘공교육 멈춤의 날’로 선포하고, 정부의 ‘위법’ (중징계와 형사고발) 협박에도 불구, 국회 앞 5만 명 추모집회와 전국 시도 교육청 앞 추모집회를 열었다.
최근 들어 특이한 점은,
기존 교원단체인 교총이나 전교조 외에 ‘인디스쿨’ 교사들이 7월 18일 서이초 교사의 죽음 이후 매주 집회를 열면서 갈수록 힘과 규모를 증폭하고 있다는 점!
1차 집회 때는 5천 명이 모였으나 2차 3만 명, 3차 5만 명에서 6차 6만 명,
7차 30만 명까지 늘었다.
원래 ‘인디스쿨’은 전국의 초등교사들이 20년 전부터 온라인으로 교육자료나 수업경험 등을 공유해온 플랫폼이다.
회원이 14만 명으로, 전국 초등교사의 약 75%다.
‘정치적’ 입장이 강한 전교조와 달리 인디스쿨은 ‘탈정치’를 표방한다.
그러나 9월 2일 7차 집회까지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스스로 조직하고 교육부나 국회를 상대로 정책적, 법적 요구안을 적극 개진해온 과정은 그 자체가 ‘건강한 정치’로서 신선한 면모를 드러냈다.
흔히, 교직은 천직이라 하는데, 그것은 ‘신성한’ 하늘의 부름에 따른 일(소명)이란 의미에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듯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우주의 죽음’이란 말도 있는데, 이에 빗대면 ‘한 사람을 제대로 교육함은 한 우주를 보살피는 일’이다.
그런데 이 천직을 수행하는 교사들이 알게 모르게 죽어나간다. 얼마나 심하며, 왜 그런가?
교육부의 ‘2016∼2021년 재직 중 사망한 교사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6년 동안 해마다 평균 100명 이상, 총 687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이들 중 76명(11%)이 자살이었다.
이는 나라 전체의 사망자 중 자살이 4% 내외인 점을 고려할 때,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리고 한창 교육적 의욕이 높은 20, 30대 교사가 전체 자살자의 38%를 차지했다.
또 다른 교육부 자료엔 2018년 1월부터 2023년 6월까지 공립 초중고 교사 중 무려 100명(초등 57명, 중학 15명, 고교 28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초등 교원 수가 19만 명이고, 중고교 교원이 24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초등교사 사망률이 더 높다. 2022년과 2023년 들어 교사의 자살 빈도가 증폭했다.
한편, 학생이나 학부모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교사도 많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폭행을 당한 교사는 무려 1133명이다. 2018년 172건이 2022년 361건으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전체 교권 침해 행위 중 ‘폭행’이 2019년 13.4%에서 2022년 19.1%로 늘었다.
심지어 어떤 학부모들은 아이의 휴대폰을 통해 수업과정을 실시간 감시하기도 한다.
아이가 문제 상황의 당사자(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된 경우,
교사에게 일방적 책임을 요구하며 수시로 전화나 폭언을 일삼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교사들은 무기력과 두려움, 자괴감과 절망감에 짓눌린다.
어쩌다 우리네 교육 현장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미 오래 전부터 ‘교실 붕괴’ 내지 ‘교육 불가능’ 얘기가 많았지만,
이번 서이초 교사 자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한국 교육의 구조적 문제를 성찰해 본다.
물론, 현장 교사들이 직접 경험하는 현실은 매우 처참하다.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의 꿈인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갈수록 한숨만 나올 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의 한 관계자도, 최근 교사들이 “학생에게 매까지 맞는 교권, 존중받지 못하는 풍토, 실질 임금은 점차 감소하는데 희생만 강요당하는 사회 분위기에 무기력해진 상태”라며, “교사를 극단적 선택으로 모는 건 학생 지도의 어려움과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 급증 탓”이라 할 정도다.
또, 전교조 전희영 위원장은 “연이은 교사 죽음에 대해 한 점 의혹을 남기지 않고 모든 진상을 규명할 것을 교육당국과 수사기관에게 강력 촉구”했다. 나아가 “교사가 죽지 않는 교육환경”을 만들 것, “안정된 교육환경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를 보호할 것”을 주문했다. 한편, ‘인디스쿨’ 주도의 9월 2일 여의도 집회(7차)는 “두려움을 나아갈 용기로, 연대를 공교육의 희망으로”라는 구호 아래, “학교 의문사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중 처벌, 아동복지법(17조 5호), 학교폭력예방법(2조) 등 관련 법 개정, 악성민원과 문제행동 학생 대응책 마련과 책임 명시, 학교에 보육 밀어 넣기 중단, 현장 교사가 참여하는 교육정책 소통” 등을 요구했다.
당연히, 당국은 이러한 교사들의 세밀한 요구들에 귀 기울이고 진정성 있게 접근해야 한다.
이어 볼 것은, 아이들 역시 예사롭지 않다는 점!
교사단체 ‘좋은교사운동’에 따르면 현재 수업 교실에 ‘정서·행동 위기학생’이 있다고 응답한 교사가 87.1%나 됐다. 2022년 10월, 정서·행동 위기학생 현황 파악을 위해 전국 유·초·중 교사 68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구체적인 행동문제로는
친구 때리기·꼬집기 등,
교실 이탈,
욕설과 폭언이 가장 많았다.
또, 위기학생 유형으로는
ADHD(78.6%),
반항(52.9%),
품행(50.5%),
무기력(49.7%)이 꼽혔다.
한마디로, 지난 50년간 아이들의 ‘사회적 DNA’가 현저히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부모들의 ‘사회적 DNA’ 변동을 상당히 반영한다.
우리 모두 사회의 구성원이니까!
여태껏 나는 한국 교육에서 학생들, 즉 아이들이 일종의 ‘인질’이 되어 붙잡혀 있는 꼴이라 보았다. 국가나 교육당국(학교와 교사 포함)이 부모를 상대로 모종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얘기! 그 요구란 아이들을 국가나 자본이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노동력)’으로 키우는 것이다.
부모들은 인질로 잡힌 아이들이 무사히 졸업(나아가 취업)할 때까지 국가나 학교 앞에 전전긍긍한다. 물론, <하류지향>을 쓴 우치다 다츠루 교수처럼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글로벌 자본의 이해와 (100년을 내다보는) 국민국가의 이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국민국가 역시 대체로 글로벌 자본과 이해를 같이 한다.
현 윤석열 정부가 잘 보여주듯! 이렇게 학교는 사실상 (자본을 위해) 노동력을 생산, 공급하는 공장이 된 지 오래다. 아이들은 그 인력 공장에 인질로 잡혀 꼼짝 없이 ‘사육’된다.
물론, 이 모형은 큰 차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왕의 DNA’ 가진 소비자 상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자
그런데 이번 교사들의 죽음을 좀 깊이 애도하면서 나는 ‘교사도 인질’이란 생각에 이르게 됐다. 새 인질 모형에 따르면, 교사를 인질로 붙들고 있는 것은 국가와 자본 외에 (교육 소비자로서의) 학생과 학부모다.
이제 인질이 된 교사의 보호자는 (건강한 교육철학이 있는) 학교 내지 관할 교육청이다.
(실은 대다수 학교 내지 교육청조차 공범 내지 인질범이기 일쑤다. 이 경우, 교사의 보호자는 그 부모나 가족 외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인질극을 벌이는 자들은 교사가 속한 학교나 교육청을 상대로 (또 교사를 상대로) 무엇을 요구할까?
그것은 아이들을 ‘성실하고 유능한’ 노동력으로 기르되, ‘고객=아이’가 ‘왕의 DNA’를 가진 소비자이니, 왕을 대하듯 친절하고도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것!
물론, 소비자(=왕)로서의 학부모나 학생은 인질인 교사에 대해
노동력 양성(노동력 상품 생산노동)보다는
최고의 서비스(상품으로서의 서비스노동)를 더 바랄 것이다.
교육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부모 입장은,
‘왕의 DNA를 가진 내 아이’가 (시답잖은 아이들이 많고) 별 재미도 없는 학교에 꼬박꼬박 등교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우치다 교수 말처럼 ‘등가법칙’에 따라 ‘불쾌함 참기=화폐’를 지불했으니, 교육청·학교·교사는 내 아이에게 그에 상응하는 최고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것!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학부모가 삶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면 더 그러기 쉽다. 화폐와 권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답게!
이에 교사는 ‘눈물을 머금고’ (마치 영화 ‘다음 소희’에 나오는 콜센터 노동자처럼)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자칫 ‘정서 학대죄’로 수사 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러나 버티고 버티다 (무기력과 두려움에 압도당한 나머지)
그 최종 선택은, 살기 위해 학교를 떠나거나 아니면 차라리 삶을 포기하는 것!
(물론, 다행히도 ‘살아서’ 현실을 바꾸려는 교사가 더 많다. 그럼에도 삶을 버린 교사들을 제대로 애도하고,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메커니즘을 잘 꿰뚫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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