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마음의 서열화, 그 보이지 않는 감옥!

닭털주 2023. 12. 1. 09:13

마음의 서열화, 그 보이지 않는 감옥!

 

 

사회적 차원에서의 서열화 타파 운동이 모두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인간화 과정이라면,

개인적 차원의 성공·출세 운동은 기존 서열 구조 안에서 더 빨리, 더 높이 오르려 하기에

서열화 구조와 심리를 강화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대다수는 마음의 서열화에 의해 스스로 지배당한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나오듯,

척도(ruler)가 지배자(ruler)로 돌변한다!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해마다 대입 수능은 뜨겁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대학진학률이 45%인데 한국은 여전히 70% 수준!

수능 100일 전부터 부모들은 절과 교회를 찾아 합격 기도를 올린다.

자녀의 대학 합격이 인생 성공의 척도! ‘(n)수생이 느는 이유다.

학교도 학교지만 학원은 솔직히, 시험 덕에 산다.

크게 보아, 학교, 학원, 종교는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먹고 사는 혈맹관계!

흥미롭게도 과거엔 부모가 못 배운 한 때문에 소 팔고 논 팔아 자식 교육에 올인했다면, 오늘날 부모는 대다수 대졸자임에도 여전히 자녀 입시에 목을 맨다.

우리네 행복을 좀먹는 이 기이한 현상의 뿌리는 뭔가?

얼핏 봐도, 한국에선 출신 대학 꼬리표가 평생 간다!

누군가 처음 만나면 이름과 사는 곳, 나이와 출신 대학을 묻는다.

노골적으로 묻진 않아도 직간접으로 탐문한다.

사적, 개인적 관계조차 이럴진대, 공적, 조직적 관계에서야 말할 나위 없다.

내가 시민아카데미 같은 데 강의할 때도 이력서를 내야 한다.

학력, 학위, 지위가 시간당 보수 계산의 기준!

이와 관련해 긍지를 느끼는 이보다 상처를 받는 이가 훨씬 많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무엇이? 우리의 태도와 현실이! 어째서?

만일 우리가 이 반복되는 구조적 상처의 메커니즘을 더는 아니오!’라며 사회적으로 결단하고 대학 서열화와 직업 서열화 타파에 나선다면 10년이나 20년 뒤엔 서열 구조 대신 수평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있냐고? 있다! 탈차별, 탈권위를 주창한 68혁명 이후의 유럽 사회를 보라!

독일 등 유럽 대학은 이른바 일류대개념이 없다.

직업 간 차별도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덜하다.

농부나 벽돌공, 조립공이나 배관공이 교사나 의사를 한국처럼 부러워하진 않는다.

수평 구조를 만든 사회 덕이다.

그러나 한국이 걸어온 길은?

서열화 타파를 위한 사회적 결단보다는 성공과 출세를 위한 개인적 결단이었다.

인정 욕망 내지 권력 욕망이 핵심! 바로 이 태도가 21세기 오늘날 역시 (아이들 꿈을 북돋기보다) ‘수능에 목을 매는묘한 사회를 낳았다.

그것도 본인이 원하는 전공보다 부모나 사회가 높이 치는 대학을 택한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서열화 타파 운동이 모두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인간화 과정이라면, 개인적 차원의 성공·출세 운동은 기존 서열 구조 안에서 더 빨리, 더 높이 오르려 하기에 서열화 구조와 심리를 강화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대다수는 마음의 서열화에 의해 스스로 지배당한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나오듯, 척도(ruler)가 지배자(ruler)로 돌변한다!

대학 입시와 노동시장 장벽 외에 국가 권력도 우리 삶을 공정하게서열화한다.

초등생조차 너거 아부지 머 하시노?’에 관심 가지며 누구 부모가 힘의 우위인지 비교, 경쟁한다. 학교폭력의 배경에 흔히 권력자부모가 도사린 현실이 증거다.

어른들 세계도 마찬가지다.

반듯한 대졸자 또는 일류대 출신이 아니라면 대통령 자격도 없다는, 기상천외한 생각이 마치 보편 상식으로 통하는 게 지금 한국 정치다.

프랜시스 골턴의 신체적, 생물학적 우생학에 견주면, 이는 정치적, 사회학적 우생학이다.

이 우생학이 끝내 인종주의와 홀로코스트를 불렀음을 기억하자.

수시로 보도되는 정당별 여론조사나 인기도 조사 역시 권력 욕망의 산물! 여야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의 덫에 빠지는데, 이 역시 온 사회 구성원의 장기적 생존과 행복보다 단기적 권력 욕망이 만든 것! 예부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해도, 실제 현실은 냉혹한 서열화 체제다. 구조적 서열화보다 무서운 것은 마음의 서열화다. 이 마음의 서열화부터 깨지 않으면 구조적 서열화가 굳어진다.

대학 입시와 취업 시험 외에는 공부와 담을 쌓고 사는 사회, 여기엔 희망이 없다.

그러나 마을·지역마다 눈과 귀를 열고 둘러보시라.

여기저기 열명 내외 모이는 만남들이 있다.

둥글게 둘러앉아 좋은 책을 읽고 열린 대화를 하면, 상처와 두려움은 사라지고 활력과 용기가 솟는다. 비록 소수지만 살아 있음의 기쁨과 작은 희망을 만들어내는 즐거운 활동들! 이 운동들이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권력 질서에 균열을 낸다. 계란으로 바위에 자국을 내듯, 빗물이 바위를 뚫듯, 나무뿌리가 바위를 깨듯, 그렇게 틈을 만든다. 우리 대다수가 일관되게 이런 자세로 산다면, 서열화 타파도 불가능하지 않다.

이미 오래전, 찰스 다윈은 지구의 수많은 생명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순위를 매기고 자연에도 순위를 매긴다.

객관적으로볼 때, 어머니 같은 대자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며 우월의식을 강조하며 만물을 사다리(위계)로 본다.

루이 아가시의 자연의 사다리개념이 온 사회로 확장됐다.

이런 시각이 자본주의와 더불어 공동체를 해체하고 서열 체제까지 낳았다.

그리하여, 권력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고 뇌물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이 서열화가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상하를 다투는 서열 경쟁은, 실은 성공해도 공허하고, 실패하면 낭패인 게임! 오늘날 우리는 이 감옥에 갇혀 신음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대입 소동은 이 신음 소리의 일부다.

관청이나 학교의 높은 담장을 허물듯, 마음의 서열화와 구조의 서열화를 허물어야 비로소 모두 자유인(!)이 된다.

향모를 땋으며의 로빈 월 키머러처럼 보이지 않지만 만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에너지로 가득한 세계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 온갖 가짜 척도를 없애면 새 세상이 열린다!

토지의 박경리처럼 모든 생명은 공평하다. 자신에 대한 연민은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야마오 산세이의 자연, 지구, 우주의 자애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옛날 인간이 미래다.

기후위기와 전쟁위기가 세상을 옥죄는 지금, ‘나부터생명 감수성을 되찾고 이웃과 더불어모여 앉아 열린 마음으로 세상만사를 논하기 시작하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