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측정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

닭털주 2024. 3. 3. 21:18

측정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

수정 2024-02-21 18:48등록 2024-02-21 18:22

 

 

게티이미지뱅크

 

[똑똑! 한국사회]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개학일이 다가온다. 다음달이면 초중고생의 급식이 다시 시작된다. 학생들은 각 지방자치단체의 학교 급식 예산을 재원으로 전문가가 설계한 식단에 따라 각종 영양소가 골고루 함유된 점심을 먹게 된다. 나처럼 방학 내내 아이들 삼시 세끼를 챙기기가 못내 버거웠던 학부모들은 세금 내는 보람을 새삼 느끼게 될 터이다.

 

또한 3월은 신입생에게는 새로운 시작인 입학이 있으니, 설렘과 긴장을 함께 경험하는 시기가 되리라. 대학 새내기 자녀를 위해 일반물리학 교과서를 구하려는 지인을 며칠 전 만났다. ‘혹시나하는 생각으로 책장 맨 꼭대기 칸에서 켜켜이 먼지 쌓인 책을 하나 꺼내어 내가 신입생 때 쓰던 교재라며 보여드리자, 이 책이 맞단다. 할리데이와 레스닉의 일반물리학이었다.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우선 후배들도 나와 같은 책으로 공부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1991년에 구매한 이 교재는 두께가 과장 없이 5에 육박한다. 두 손으로 공손히 들게 되는 소위 벽돌책이다. 아마도 지금 내가 겪는 척추 옆굽음증이나 허리통증에도 한몫했으리라. 압도적으로 많은 연습문제를 푸느라 여지없이 지나가 버린 내 청춘의 주말들이 떠올랐다. 연습문제를 깔끔히 풀었을 때 느끼던 희열,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풀지 못한 문제가 남긴 좌절도 함께 말이다. 내게는 분명 잊지 못할 애증의 책이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책이 교재로 쓰인다는 사실은 다소 당혹스러웠다.

그동안 한글로 쓴 대학 물리 교재는 없었던 걸까.

문제 풀고 숙제 제출해야 했던 학생 때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니 비로소 하나의 책으로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60년에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무려 47개국으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2002년에는 미국 물리학회에서 가장 뛰어난 물리학 교재로 선정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저자 할리데이는 2010년에 94살로, 레스닉은 2014년에 91살로 타계했다.

대학 교재를 통해 전세계로 수십년 동안 꾸준히 물리학의 기초를 전파했으니, 저자들은 노벨상 수상자 못지않게 물리학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책은 제3판인데 지금은 제11판이 널리 쓰인다.

문득 내가 올해 새내기라면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 궁금해서 새 책을 사봤다.

측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심오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측정과학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현재의 나로서는 이 질문의 무게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새내기일 때는 이토록 두꺼운 교과서가 어째서 멋진 방정식이 아니라 관측과 측정이라는 쉬운 단어로 시작하는지 고개를 갸웃했었다. 무심히 쓰던 측정이라는 단어 하나에 얼마나 많은 과학자의 땀과 피의 역사가 서려 있는지 알고 있는 지금은 선대 과학자들께 절로 고개가 숙어질 뿐이다.

 

변하지 않는 물리상수와 방정식이 있는가 하면 바뀌는 것도 있다.

더욱 정밀한 측정과 관측이 가능해지면서 과거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영역까지도 인식이 확장된 덕분이다.

맨눈으로 관찰하던 시대에서 돋보기라는 측정 기기가 등장하면서 세계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더 나아가 광학현미경, 그리고 전자현미경으로 측정 기기가 발전할수록 인식의 지평은 차츰 넓혀져 왔다.

측정의 역사는 곧 과학의 역사다.

 

내가 배운 교재에서는 가장 작은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 접두어는 100경분의 1인 아토(atto, 10-18제곱)였다. 그로부터 30여년 후인 올해 새내기들은 아토보다 100만배나 작은 1자분의 1(10-24제곱)인 욕토(yocto)를 배우며, 다음 판본 교재에서는 2022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결의된 퀙토(quecto, 10-30제곱)도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30년 뒤에는 과연 어떤 접두어가 새로 정의돼 얼마만큼까지 정밀한 측정이 가능해질까? 현재의 측정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지금 얼마나 많은 과학자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까?

측정과 과학의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