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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중년 맞이 MBTI 개조 프로젝트

닭털주 2024. 3. 2. 11:24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중년 맞이 MBTI 개조 프로젝트

 

수정 2024-02-28 18:59 등록 2024-02-28 18:18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올해부터 이에스티제이(ESTJ)로 살겠어!”

 

설을 앞두고 친구가 선언했다. 나이 오십 넘어 엠비티아이에 연연하는 네 인생은 좀 바꿀 생각이 없냐고 묻고 싶었으나

때가 때인지라 내 안에 얼마 남지 않은 에프(F: 감정형)를 끌어모아

그래애? 왜애~?”라고 영혼 없는 답변의 끝을 올렸다.

의외로 영양가 있는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융이 중년이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반대의 삶을 살라고 했거든. 나는 아이엔에프피(INFP)로 오십년 살았으니까

이제 반대로 살아봐야지.”

설득력 있는 논리에 빠져들었다.

 

친구는 카를 융의 빛과 그림자 이론을 말하는 거였다. 융에 따르면 빛을 밝히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빛에 치우친 행위를 했다면 그림자에 해당하는 반대행위를 통해 균형을 맞춰야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인생 52년 차 최아무개씨의 사례를 통해 이 이론을 이해해보자.

그녀는 대문자 에프(F). 극강의 관계중심적 인간이다.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좋고 누군가에 대해서 험담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그가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호소할 때 니 동료가 개새끼네반응하는 나에게 동료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잦은 야근 등으로 등골을 뽑히다 말하지 못한 분노와 환멸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장렬하게 사표를 내는 것으로 직장생활을 마감하곤 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자신의 스펙과 나이에 비해 아쉬움이 느껴지는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다. 친구는 조만간 자기 인생에서 직장생활을 완전히 마감할 것 같다는 우울한 토로와 함께 중년 인간개조 프로젝트에 나선 것이다.

 

융의 빛과 그림자 이론은 중년의 위기와 직결된다.

청년기까지 우리는 빛에 해당하는 과업을 향해 달려간다. 입시나 취업, 승진 같은 게 대표적이다. 연애나 결혼도 마찬가지다. 하루로 따지면 이십 대에 해당할 정오쯤 우리의 그림자는 가장 짧고 해 질 녘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빛을 만들기 위해 억압해온 내면이 만드는 그림자는 중년쯤이 되면 빛을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 이것과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면 투사라는 방식으로 불평만 쏟아내는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소수자, 유명인 등 다양한 투사의 대상을 찾는다.

그중 가장 흔하고 최악인 게 자식에 대한 투사다.

부모들의 대부분은 자식을 위해 채찍질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내 그림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전가하는 것뿐이다.

 

그림자는 두려움, 이기심, 질투,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고여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이겨내고 극복해야 할 감정이라고 훈련받았지만 아무리 큰 성취도 이를 없앨 수는 없다. 도리어 커진다.

마음의 바닥에서부터 고여 찰랑찰랑 넘치기 직전의 위험신호에 대응하지 않으면 터지고 쏟아질 수밖에 없다. 이타심의 화신으로 친구와 동료의 불평불만과 개소리를 다 들어주고 진심으로 조언하던 한 친구는 큰 병에 걸리고 말았다. 융에 따르면 이기심도 우리 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요소이고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어둠을 의식하면서 온다.”

 

친구에게 영감을 받아 나도 중년 인간개조 프로젝트에 돌입하기로 했다.

구글에서 몇 번 해봤던 내 엠비티아이를 이야기하니 니가 에스(S:감각형)라고? 너처럼 실무 정보 제로인 사람을 내가 오십 평생 본 적이 없다. 나 에스랑은 십 분도 대화 이어가지 못한다구. 너 엔(N:직관형)이야화를 낸다.

몇달 전 내가 티(T:사고형)라고 하니까

그럴 리가 없다며 면전에서 부정당했던 후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아무래도 두 가지 상충하는 성향이 통합된, 융이 말한 진정 조화로운 인간인 것 같다.

 

완전무결한 내 인생의 유일한 옥에 티는 빼박 피(P:인식형)이라는 것이다. 정리와 계획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업무 관련 연락처 명부 같은 건 만들어본 적도 없고 엑셀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들을 보면 필즈 메달을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찬탄이 나온다. 수많은 다짐과 약속이 깨져나갔고 빚쟁이에 쫓겨 다니는 느낌으로 슬슬 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제이(J:판단형)로 개조를 해보기로 했다. 평소 편집자에게 애걸복걸하며 지각을 밥 먹듯 하던 마감을 이번에는 반나절이나 당겼으니, 후훗 절반은 성공한 거 같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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