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바닥에서 일어서며 [김탁환 칼럼]

닭털주 2024. 3. 27. 10:13

바닥에서 일어서며 [김탁환 칼럼]

 

 

농부들은 사시사철 새벽부터 저녁까지 성실하지만, 가난을 벗어난 이는 매우 드물다. 정치와 종교가 부의 불평등을 낳는 기존 틀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농촌 현실에 실망한 이들이 도시로 옮겨 다른 직업을 갖기도 하지만, 거기서도 극빈자로 좌절하긴 마찬가지다. 처절하게 절망한 이들은 고향인 농촌으로 돌아와 쓰러진다.

 

수정 2024-03-26 18:42 등록 2024-03-26 15:26

 

 

필자가 농사지은 옥터 옆 텃밭의 시금치. 사진 김탁환

 

 

김탁환 | 소설가

 

 

어둑새벽부터 시금치를 거뒀다. 내일 아침 트랙터로 밭을 갈기로 한 것이다. 늦가을에 심은 시금치는 겨울을 견디고 봄에 쑥쑥 자랐다. 함박눈이 마을과 논밭을 뒤덮었을 때는 과연 어린 시금치가 살아남을까 걱정도 했었다. 땅에 거의 붙다시피 한 잎과 줄기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고 여렸다.

 

따스한 봄기운에 매화와 산수유와 벚꽃까지 만발했지만, 새벽에 움켜쥔 흙은 아직 차갑고 단단했다. 호미를 든 채 쪼그리고 앉으니, 싸늘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무릎과 허리까지 순식간에 올라왔다. 시인들은 참담한 날들을 종종 겨울에 비기곤 했다. 양성우는 1975년 광주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서 유신독재를 겨울공화국으로 간주했고, 황지우는 1985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통해 혹한을 극복하고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를 그렸다.

 

봄이 왔는데도 봄이 아니라는, 여전히 춥고 아프고 외롭다는 원성이 황소바람처럼 거세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이야기는 없고 현저하게 나빠졌다는 수치만 줄을 잇는다.

 

나라 사정이 힘겨우면, 인구소멸 고위험 지역인 지방 농촌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경제는 물론이고 교육과 의료와 문화에서 취약한 부분이 수도권 도시에 비해 많기 때문이다. 읍내인데도 저녁 장사를 접은 식당과 가게가 한둘이 아니다.

갖가지 행사들도 축소되거나 취소되었다.

동네 책방에서 저자를 만나고 독서 모임을 갖는 횟수마저 대폭 줄었다.

문 닫는 가게가 잦은 만큼 빚은 무겁고,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폐교는 는다.

곤두박질치는 현실에 두손 두발 다 들게 생겼으니 이제 정말 바닥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넋두리처럼 얹혔다.

 

긴 겨울밤 텃밭의 시금치를 격려하며, 조제 사라마구 장편소설 바닥에서 일어서서를 읽었다. 포르투갈 농업 노동자 삼대의 이야기다. 땅을 갖지 못한 채 임금만 받고 일하는 사람들의 고초가 가감 없이 담겼다. 농부들은 사시사철 새벽부터 저녁까지 성실하지만, 가난을 벗어난 이는 매우 드물다. 정치와 종교가 부의 불평등을 낳는 기존 틀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법과 교리는 지주들을 보호하고 농부들을 징벌하는 방편으로만 쓰인다. 농촌 현실에 실망한 이들이 도시로 옮겨 다른 직업을 갖기도 하지만, 거기서도 극빈자로 좌절하긴 마찬가지다. 처절하게 절망한 이들은 고향인 농촌으로 돌아와 쓰러진다.

 

귀향자들이 죽음의 늪에 빠지지 않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땅바닥 덕분이다.

땅이 지치고 야윈 등을 떠받쳤기에, 그들이 쏟는 피와 눈물을 고스란히 받아들였기에 돌이킬 수 없는 끝에 이르진 않은 것이다. 조제 사라마구는 적었다.

땅은 분명히 인간보다 앞서 생겼고, 오래, 아주 오래 존재해왔음에도, 여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그는 땅이 불멸하는 이유를 변화에서 찾았다.

땅 색깔이 녹색과 노란색과 갈색과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자꾸 바뀐다는 것이다.

그곳에 뭘 심었느냐 또는 뭘 심지 않았느냐에 따라 변화 양상 또한 다채로웠다.

우리에게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농작물이 나고 자라 열매 맺고 죽는 흐름에서 달라지는 것은 땅 색깔만이 아니다. 대대로 그 땅을 일군 농부들 역시 농작물과 같은 생로병사를 겪었다. 처절하게 되풀이되는 나날에서 땅은 고유한 색깔을 갖고 농부는 지혜를 터득한다. 살면서 만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며, 조제 사라마구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농부 외할아버지를 추억했다.

 

밭일을 마친 뒤 마당에서 시금치를 씻었다. 뿌리째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겨울을 버틴 만큼 맛과 향이 진했다.

23년 동안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아침을 매일 선사했던 김창완의 마지막 방송을 찾아 들었다.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듯하면서도 친근한 목소리가 흙투성이 내 무릎에 내려앉았다.

물에 빠졌을 때 수영장에서 어떤 분이 그랬어요. 바닥을 차야 나온다고. 걱정하지 마라. 그냥 푹 가라앉았다가 물 펑 한번 차면 물 밖으로 나와.”

 

시금치를 거두면서 겨울을 되살폈다면, 밭을 갈고 새로 심는 작물을 통해 뜨거운 여름과 넉넉한 가을을 떠올린다. 농사는 해마다 반복되고, 농부의 삶은 30여년 간격으로 논밭에서 대를 이으며, 나라와 지역을 위한 일꾼들을 뽑는 선거는 4년마다 돌아온다. 410, 우리가 어떤 당과 후보를 택하느냐에 따라, 땅도 세상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쓰러져 한숨짓고 눈물 쏟을 때가 아니다. 주먹을 쥐고 바닥에서 일어설 때다.

일어나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어깨 겯고 나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