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여름과 등을 맞댄 ‘가을부채’ [말글살이]
수정 2024-08-29 18:37 등록 2024-08-29 14:34
클립아트코리아
몇년 전만 해도 무더운 여름이 닥치면 접이부채 하나 꺼내 들고 의기양양 집을 나섰다.
땀이 날 때마다 잽싸게 촥 펼쳐 좌우로 훼훼 저으면, 없던 바람이 일면서 땀을 식혀 주었다. 곳곳마다 에어컨 없는 곳이 없고 저마다 휴대용 선풍기(손풍기)를 들고 다니니 장사 안 되는 과일가게 김 사장의 열불 나는 부채질 말고 부채를 부치는 사람이 드물다.
가마솥더위가 일상이 된 여름 기세가 아침저녁으로 제법 꺾인 걸 보니 가을이 기어코 오긴 오려나 보다(가을의 도래를 안도하다니).
가을이 오면, 부채는 찬밥 신세.
‘병목 현상’이 영어 ‘bottle neck’(보틀넥)을 직역한 것이듯,
‘가을부채’는 한자어 ‘추선’(秋扇) ‘추풍선’(秋風扇)을 번역한 것이다.
‘능력을 인정받던 사람이 철이 지나 불필요해진 물건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
‘겨울철의 부채와 여름철의 화로’라는 뜻의 사자성어 ‘동선하로’(冬扇夏爐)도 비슷한 뜻이다.
‘가을’이란 말소리에서 느껴지는 무해함 때문인지 말맛이 좋긴 한데, 뒷방 늙은이 처지가 된 사람을 철 지난 부채에 비유하니 그 가련함이 절절하다.
‘가을부채’ ‘겨울부채’ 둘 다 철 지난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뜨거웠던 여름과 등을 맞대고 있는 ‘가을부채’에 더 마음이 간다. 애당초 세상 인정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았으려나. 차라리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이 한 줌의 쓸쓸함과 아쉬움도 없었으려나.
나는 지금도 이렇게 뜨거운데, 이렇게 꿈틀거리는데,
세상은 매정하게 ‘당신은 이제 쓸모가 없어요’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가을부채’가 부럽고 좋다.
이제라도 모든 ‘쓸모’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만끽하며 살 수 있을 테니.
나는 왜 여전히 ‘여름부채’로 펄럭대고 있는가?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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