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순이, 금명이, 그다음을 위하여 [노정혜 칼럼]
수정 2025-05-01 18:46 등록 2025-05-01 16:08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국제적 사랑을 받고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16부작을 모두 몰아 보며 펑펑 울었다.
제주도 해녀의 집안에서 할머니와 엄마, 딸로 이어지는 여성 3대의 좌충우돌 인생사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를 같이 겪어온 엄마 세대인지라, 악조건에서 꿈을 이루어내는 과정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1950년대 가난한 해녀의 딸로 태어난 총명한 엄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시인이 되는 꿈을 가졌지만, 험난한 인생길에서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일편단심 자신을 부추겨준 남편의 도움으로, 또 가난과 편견을 딛고 스스로 길을 찾은 딸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룬다.
이 이야기는 지난 70년에 걸친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성을 출산과 가족의 돌봄이란 전통적 역할에 묶어두려는 경향이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음도 보여준다.
200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남녀 모두 80%를 넘나들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남학생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게 되는 20대 중반에는 취업률과 소득에서 남녀 간 차이가 별로 없다. 그렇기에 여성을 우대하는 정책들이 역차별이라고 느끼는 남성들이 2030세대에 많은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경제활동을 하는 남녀 간의 소득 격차는 30대 중반 이후에는 급격히 벌어진다. 취업 뒤 경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암초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출산과 육아, 가족 돌봄의 짐이 비대칭적으로 부과되어 여성의 경제활동을 방해한다는 통계와 분석은 넘쳐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가 특히 심하다.
일하는 여성의 임금 또는 소득이 남성보다 낮은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 격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은 2023년 현재 약 11% 정도다.
즉, 남성이 100달러를 받을 때 여성은 89달러를 받는 정도의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
이 격차는 지난 수십년간 조금씩 좁혀져 왔고, 대부분의 국가는 2~15% 정도의 격차를 보인다.
20%가 넘는 차이를 보이는 나라는 두곳인데,
일본(22%)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나라(30%)다.
여성이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갖는지를 평가하는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우리나라는 지난 10여년간 오이시디 국가 중 최하위였다.
심지어 대학의 연구활동을 측정하는 한 지표인 연구비 수주에서도
우리나라의 여성 교수는 남성에 비해 1인당 평균 절반도 안 되는 연구비를 받는 것으로 집계된다.
왜 성별 임금 격차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의견은 남녀 간에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데이터 분석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올해 보고에 따르면,
약 15%의 임금 격차를 보이는 미국에서 여성들은 절반 이상이 고용주가 여성을 남성과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주원인이라고 답한 반면, 남성들은 여성이 일-가정 균형을 위해 남성과 다른 선택을 하기 때문이라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여성들은 절반 이상이 기업 내 채용과 승진, 배치에서 차별이 누적된 탓이라고 답한 반면, 남성은 여성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 평균 근속연수가 적기 때문이라는 답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 간의 인식 차이는 비슷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클로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는 성별 임금 격차가 생기는 원인으로
일자리의 성격과 가족에 대한 여성의 부담을 꼽았다.
‘커리어 그리고 가정’(Career and Family)이란 저서에서 그는 187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약 100년 동안 출생한 미국의 여성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 경력과 가정 사이에서 어떤 선택과 제한을 경험했는지 분석하였다.
가정과 경력 중 하나를 택했던, 즉 경력을 위해서는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던 1세대부터,
경력을 쌓고 나중에 결혼, 또는 그 반대의 순서로 선후를 바꾸어가면서 선택을 하던 2, 3, 4세대를 거쳐,
경력과 가정을 동시에 추구하려는 5세대(현재 40대 중반 이상)에 이르기까지,
세대별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들과 경력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을 찾았다.
골딘 교수는 여성이 경력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고 남녀 간의 임금 격차가 벌어지는 구조적 원인으로,
보수가 높은 직업들의 상당수가 ‘탐욕스러운 일’(greedy job)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탐욕스러운 일자리는 높은 밀도로 불규칙한 일정에 대응하는 장기 근무를 요하고, 그 대가로 높은 보수를 지급한다.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임무를 떠맡은 여성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일자리다.
행복한 가정과 성공적인 경력을 다 원하지만, 둘 사이에 시간적 충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여성은 높은 보수를 포기하고,
가정 친화적인 일을 택할 수밖에 없는 압력을 받게 된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이 성별 임금 격차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 뒤 남녀 간 격차 없이 경력을 시작한 여성들의 상당수가 30대 중후반에 이르면,
가족의 필요에 의한 선택이든 암묵의 차별이든 승진이나 경력의 상승을 포기하고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일자리를 선택하게 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아예 일터를 떠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일을 하다 그만둔 경력 단절 여성이 약 100만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출산과 육아, 가족 돌봄의 부담으로 일을 그만둔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최고의 교육을 받는 데 남녀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
작년에 인문사회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의 55%는 여성이고, 이공계는 박사학위자의 31%가 여성이다. 이들이 경력과 가정 중 하나를 배제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은 개인을 떠나서 국가적으로도 불행이다.
우리나라가 경제 규모에 걸맞게 사회문화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려면, ‘행복한 가정과 성공적인 경력’을 추구하는 데 남녀 간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남성의 기여, 성공적인 경력을 위한 여성의 노력이 더 격려되어야 한다.
유연하고 예측가능한 업무 형태가 더 많아져야 하고, 가족 돌봄의 짐이 여성에게 편중되지 않도록 제도와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남자와 여자 모두 만족할 수 있어야 오이시디 최하위권인 행복지수도 올라가고 세계 최하위인 출산율도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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