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986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입력 : 2024.05.14. 20:24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단과대 리모델링 공사로 연구실을 옮기기 전까지 수년 동안 사용해왔던 공간은 문고리가 헐거워 문이 저절로 열릴 때가 많았다. 시설과 선생님께 말씀드려 몇 차례 손보았지만 여전했다. 그러니 주말이나 늦은 밤 학교에 남아 일할 때면 안쪽에서 문을 잠가두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잠그는 걸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클래식 FM을 켜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익’ 하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드니 닫아둔 문이 어느새 또 스르르 열려 있었다. 볼륨을 키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어폰 아닌 스피커를 사용했으니 복도에 얼마간 음악소리가 들렸을 테다.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둔 토요일 오후였고, 같은 층..

칼럼읽다 2024.05.16

감정 규칙

감정 규칙입력 : 2024.05.09. 20:28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어도어 대표이사 민희진의 기자회견이 연일 화제다. 성공한 여성이 격에 맞지 않게 ‘격앙, 눈물, 욕설’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며 비판한다. 자신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라는 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평정 유지는 대면적 상호작용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감정 덕목이다. 함께 있는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평정을 잃으면 당사자는 물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들조차도 당혹감에 빠진다. 민희진은 평정을 잃고 감정을 날것 그대로 공중에 드러냈다. 옆에 있던 변호사 두 명이 어쩔 줄 몰라하며 상황 수습에 급급하다. 사회학자 혹실드는 모든 상황엔 ‘감정 규칙’이 있다고 했다. 감..

칼럼읽다 2024.05.14

노인을 위한 집은 없다?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노인을 위한 집은 없다?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수정 2024-05-08 19:08 등록 2024-05-08 18:27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어디서 늙어갈 것인가’가 고령화된 우리 사회의 큰 관심사가 된 게 맞나보다. 교양 다큐나 시사 프로에서 간간이 나오던 소재가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했다. 십년 전만 해도 티브이 토크쇼에서 수다를 떨던 인기 연예인들이 다양한 실버타운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내일(10일)부터 방영된단다. 몇달 전 건설 붐이 일어난 고급 실버타운 이야기를 쓰면서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향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앞 동 뷰라고 해도 내 집에서 늙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게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집 앞에 화분을 잔뜩 키우며 해 질 녘 집 앞..

칼럼읽다 2024.05.12

아무도 ‘효’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아무도 ‘효’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입력 : 2024.05.07 20:18 수정 : 2024.05.07. 20:19 김택근 시인  “꽃을 드렸습니다. 불효자의 꽃을 받고도 어머니는 그저 웃습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자식은 머리로 이해할 뿐 가슴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시대가 어머니들을 버렸습니다. 아버지들은 먼저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어머니들은 쫓겨다닙니다. 시대의 난민들입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지아비 무덤과 고향을 지키다가 결국 새끼들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 집 작은 방에 갇혀있습니다. 밤마다 생각은 천리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온 마을, 앉으나 서나 정겨운 이웃, 손때 묻어 더 번쩍거렸던 장독대, 눈물마저 거름이 됐던..

칼럼읽다 2024.05.12

‘시혜’가 아닌 ‘지혜’가 필요한 때

‘시혜’가 아닌 ‘지혜’가 필요한 때입력 : 2024.05.08 20:06 수정 : 2024.05.08. 20:09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지난 4월 중순께 광주 광산구 가족센터에서 ‘장소와 환대의 인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마련된 8회 차 강좌 가운데 하나를 맡았다.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어떻게 입을 뗄지 망설이는 시간이 길었다. 이주민 대상 인문 강좌인데 청강생의 국적, 연령대는 물론 생활환경도 제각각인 데다 한국어 습득 능력에도 차이가 있어 통역자가 함께 자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호남대학교가 2022년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인문도시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월곡동 고려인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일을 도모하고 있다. 사업단은 지역사회에서..

칼럼읽다 2024.05.12

식당이 끝나면

식당이 끝나면입력 : 2024.05.09 20:23 수정 : 2024.05.09. 20:26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내가 지인과 함께 오래 운영하던 가게를 접었다. 구구한 변명은 의미없지만 밥장사, 술장사의 종말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이익에 대한 희망은 없고, 온갖 악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나온다. 내가 개인 모바일망에 영업 중단 소식을 알리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부끄럽지만, 밥동네에 이름이 알려진 너마저! 이런 분위기였다. 음식 팔던 가게를 철수할 때는 정리해야 할 게 산더미다. 관공서에 폐업신고해야 하고, 직원들 임금도 정산해야 한다. 당연히 퇴직금과 실업급여에 대한 청구권을 도모해야 한다. 이런 행정적인 절차가, 많이 간소화된 요즘..

칼럼읽다 2024.05.10

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

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입력 : 2024.05.09 20:24 수정 : 2024.05.09. 20:26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공중을 휘젓는 새는 수시로 머릿속으로 들었다가, 앉았다가, 날아간다. 새가 날면 나는 움푹 꺼진다. 나를 개구리처럼 우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아득히 멀어지는 새. 출구를 찾아 또 떠나는 그 새들에 관한 몇 개의 풍경. 오래전,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다. 병실의 한 환자가 자신은 새인데 잠시 인간으로 변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들은 척 아니하자, 의사와 간호사를 모이게 한 뒤, 멀뚱멀뚱 쳐다보는 가운데 창문을 드르륵 열고 푸드덕푸드덕 날아갔다고 한다. 영화 버드맨>은 근육질의 남자가 팬티만 걸친 채 벌새처럼 공중부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요란하고 복잡했다. 어쨌든..

칼럼읽다 2024.05.10

푸르름에 담긴 슬픈 이야기

푸르름에 담긴 슬픈 이야기입력 : 2024.05.07 20:18 수정 : 2024.05.07. 20:19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이다. 자연이 고마운 나날이다. 이렇게 고마움을 제공하는 신록의 뒷면에는 이런 슬픈 이야기도 숨어 있다고 한다. 로마의 이야기꾼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다. 어느 날, 아폴로는 다프네를 마주치게 된다. 황금 화살을 맞은 아폴로는 사랑의 화염으로 불타오른다. 납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을 피해 달아난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쪽에서는 좋은데, 저쪽에서 싫어하는 상황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할수록, 덤벼드는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고 도망치는 사람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는다. 아폴로는 손가락, 어깨, 하얀 팔에 감탄하고, 드러나지 않은 부분..

칼럼읽다 2024.05.08

가랑비야!

가랑비야!입력 : 2024.05.01 21:37 수정 : 2024.05.01. 21:39 임의진 시인  이슬비, 보슬비, 가랑비가 촉촉해. 노랫말 속 가랑비를 아는가. 가수 양희은의 대표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김민기 곡 말고 김정신이 작사·작곡한 이 노래도 한때 방송 금지곡.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단 말인가. 가사가 부정적이고 퇴폐적이다.” 당시 금지 사유란다. 그저 실연당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는데. “가랑비야! 내 얼굴을 거세게 때려다오. 슬픈 내 눈물이 감춰질 수 있도록…” 쉬운 기타 코드 때문에, 통기타를 배우는 초짜들이 애창했던 노래. 봄비 내리고 이 노랠 부르다 보면 ‘아침이슬’까지 철야 밤샘을 하게 될지도 몰라. 양희은은 재수생 시절부터 명동의 YWCA ‘청개구리홀..

칼럼읽다 2024.05.06

바보야, 문제는 단지야! [크리틱]

바보야, 문제는 단지야! [크리틱]수정 2024-05-01 18:58 등록 2024-05-01 18:11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2024년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51.5%는 아파트에 거주한다. 아파트는 전 세계에 통용되는 적층식 공동주택방식이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단지식으로 개발됐다는 점이다(다른 나라는 공공도로에 면한 개별 건물식이 일반적이다). 아파트 단지는 1960~70년대 도시팽창기 급격히 유입되는 인구를 수용할 방책이 다급했지만, 인프라 구축을 위한 여력과 재정이 부족했던 주택 당국이 생각해 낸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자기 집값뿐 아니라 단지 내부의 도로, 공원, 놀이터, 편의시설 공사비와 유지관리비를 정부 대신 떠안은 구매자도 몇 년 있으면 올라있는 집값 때문에 ..

칼럼읽다 202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