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986

입술에 관한 몽상

입술에 관한 몽상입력 : 2024.05.02. 20:40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곡우 근처. 이즈음 물에 잠긴 논을 보면 올해 농사를 준비하는 설렘이 가득하다. 논두렁은 논과 논을 구획하는 경계이지만 또한 길고 좁은 밭뙈기이기도 하다. 옛날 모내기 끝내고 어머니는 그 자투리땅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호박이나 울콩을 심으셨지. 지난주 고향 가서 논두렁에 서서 술동이에서 막걸리 익어가듯 논바닥에서 뻐끔뻐끔 올라오는 기포를 보았다. 문득 들판의 논들을 아담하게 죄는 이 야무진 논두렁이 어째 꼭 얼굴의 입술 같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 하나가 흘러나오지 않겠는가. 입술, 인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야 손바닥보다 좁아도 만만한 장소가 결코 아닌 것.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퀴즈.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면 사..

칼럼읽다 2024.05.05

맛있게 퍼트린다

맛있게 퍼트린다입력 : 2024.05.02 20:36 수정 : 2024.05.02. 20:37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얼마전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작은 국숫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5평 남짓한 규모에 메뉴도 매우 단출해서 잔치국수와 멸치 칼국수가 전부였습니다. 유동인구도 많지 않은 이곳에서 과연 장사가 잘될까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뒤로하고, 우선 잔치국수 하나를 시켜보았습니다. 드디어 등장한 잔치국수는 잔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주 푸짐한 양입니다. 잔치국수의 핵심은 감칠맛 나는 시원한 국물입니다. 보통은 멸치, 다시마, 말린 표고버섯 등을 끓는 물에 우려내어 육수를 만드는데, 멸치에는 이노신산, 다시마에는 글루탐산, 표고버섯에는 구아닐산과 같은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

칼럼읽다 2024.05.04

얼 쇼리스가 가르쳐준 희망의 인문학 [세상읽기]

얼 쇼리스가 가르쳐준 희망의 인문학 [세상읽기]수정 2024-05-01 18:41 등록 2024-05-01 18:19  2006년 얼 쇼리스 선생 방한 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초청 세미나 모습. 왼쪽부터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 쇼리스 선생,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센터장인 임영인 대한성공회 신부, 필자 이병곤(당시 광명시평생학습원 원장). 광명시평생학습원 제공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노동한테 이겨먹기 위해/ 내가 제일 가엾다는 생각 하나로/ 누구 하나 미워할 필요 없이도//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날’(전욱진, ‘휴일’ 중에서) 유튜브에서는 ‘쇼츠’가 강자라 한다. 나의 대학원 강의 쇼츠는 시다. 늘 시를 앞세워 시작한다. ‘휴일’은 노동절에 맞춰 골랐다..

칼럼읽다 2024.05.02

풀을 매며 꽃을 생각하다 [김탁환 칼럼]

풀을 매며 꽃을 생각하다 [김탁환 칼럼]  작물을 심은 밭의 풀은 전부 뽑았지만, 비워둔 두 이랑의 풀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 풀씨들이 날아올 테니 당장 없애라는 충고를 내내 듣겠지만, 그 풀들은 그냥 두기로 했다. 경쟁에 방해가 된다고 미리 없앤 풀들은 무엇이고, 그렇게 꼭 없애야만 했는지, 호미를 씻으며 되짚으려 한다.  수정 2024-05-01 00:30등록 2024-04-30 18:38  게티이미지뱅크  김탁환 | 소설가  이틀 꼬박 텃밭에서 풀을 맸다. 초벌매기를 하지 않으면, 봄볕에 자라는 풀을 따라잡기 힘들다. 호미로 흙을 파고 흩을 뿐만 아니라, 어린 작물 주위는 무릎을 꿇은 채 장갑 낀 열 손가락으로 둥글게 훑어내야 한다. 잠깐만 딴생각을 하면 풀을 둔 채 지나치기 쉽다. 감자밭에는 감자..

칼럼읽다 2024.05.01

외로움을 즐길 수 있으려면

외로움을 즐길 수 있으려면입력 : 2024.04.30 20:57 수정 : 2024.04.30. 21:00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기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가 11년을 넘겼다. 독신으로 사는 이들의 많은 세태를 잘 반영하는 데다 유명인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해서 시청률이 매우 높다. 서울의 1인 가구 비율이 40%에 육박한다고 하니, 새로운 삶의 패턴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식사 때면 왁자지껄 몰려 다니는 풍경이 여전한 대학가에도, ‘혼밥 환영’을 써 붙인 식당이 늘어간다. 혼자 식당에 가는 게 어색해서 같이 먹을 사람을 찾곤 하던 필자 역시 혼밥 횟수가 늘어났다. 가끔은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혼밥이 가능해진 이유 중 하나는, 혼자 있음을 잊게 만드는 스마트폰이다...

칼럼읽다 2024.05.01

생각의 가지

생각의 가지입력 : 2024.04.29. 20:29 김상민 기자  종이에 아크릴 (53×78㎝) 생각이 끝도 없이 뻗어 나갑니다. 사랑, 돈, 집, 차, 여행, 가족, 꿈, 미래, 과거, 우주…. 생각이 가지에 가지를 치며 점점 더 넓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처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멍하니 생각만 하다 귀중한 시간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다시 정신 차리고 이리저리 뻗어 있는 생각들을 접고 접어 정리를 해봅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세상에 발을 디뎌 봅니다.

칼럼읽다 2024.04.30

아홉 번 꺾여도 살아나는 ‘고사리’

아홉 번 꺾여도 살아나는 ‘고사리’입력 : 2024.04.28 20:34 수정 : 2024.04.28. 20:36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저자  제철을 맞은 봄나물이 쏟아지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나물축제도 열린다. 그야말로 ‘나물의 계절’이다. 나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밭에서 기르는 농작물”을 가리키는 ‘남새’와는 의미가 다르다. “산과 들에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만을 일컫는 ‘푸새’와도 구분해 써야 한다. 나물 가운데 봄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고사리’다. 고사리의 어원은 다양한데, 끈질긴 생명력을 엿보게 하는 ‘구살이’가 변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 고사리는 꺾인 자리에서 새순이 다시 돋는다. 그렇게 아홉 번을 꺾여도 ..

칼럼읽다 2024.04.29

다시, 공부란 무엇인가

다시, 공부란 무엇인가입력 : 2024.04.25 20:55 수정 : 2024.04.25. 21:00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새삼 공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내가 속한 작은 인문학공동체와 나의 공부에 대한 질문이다. 신도시 주택가에서 16년 전 처음 마을인문학 공동체를 열었을 때, 세상에서는 우리를 ‘공주(공부하는 주부)’로 불렀다. 당황했지만 현실이었다. 이후 ‘공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다른 공부가 다른 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다시 모스, 마르크스, 폴라니 등의 공부로 연결되고, 또다시 마을작업장, 마을화폐의 실험으로 나아갔다. 이후 청년들이 오면 “청년들과 중장년 세대의 연대”라는 화두를 붙잡고, 또 밀양과 엮이면 “에너지 정..

칼럼읽다 2024.04.28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유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유그들에겐 너무 짧은 신호등, 위험해도 건널 수밖에 없다24.04.25 17:40l최종 업데이트 24.04.25 17:40l손보미(springhand)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퇴근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아직 몸이 가볍구먼!'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탓일까. 달리기를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문제가 생겼다. 오른쪽 발목과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운동화 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생겼다. 1시간을 생각하고 나갔던 달리기를 20분만 하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마침 신호등 초록불이 깜빡거리며 남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빨간 불로 바뀌기 남은 시간은 15초.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뛰었을 그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 횡단보도 앞 그늘막 의자에 앉..

칼럼읽다 2024.04.26

저마다의 디아스포라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저마다의 디아스포라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수정 2024-04-24 19:06 등록 2024-04-24 15:04  두 개의 디아스포라, 베네딕토 수도원과 미군부대 사이의 피정센터 ‘경계 위의 집’. 사진 이명석  이명석 | 문화비평가  오랜만에 고향 가는 경부선 기차를 탔다. “노스탤지어의 여행인가요?”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야 한다. “아니오. 디아스포라의 여행입니다.” 기차가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고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처럼 느꼈다. 가장 최근에 들은 고향 소식은,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이승만 동상을 가져와 전적지에 세웠다는 거였다. 어릴 적 가족이 농사 짓던 참외밭이 근처의 다른 전적지 옆에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온다고 아스팔트를 전적지 앞까지만 깔았던 기억이 난다. “니는 다리..

칼럼읽다 2024.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