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986

막다른 길 애호협회

막다른 길 애호협회 이명석 | 문화비평가 “거긴 막혀 있어요. 길이 없어요.” 선생님은 나를 차에서 내려준 뒤에도 쉽게 떠나지 못했다. “네. 걱정 마세요.” 나는 가짜 미소를 지으며 큰길 쪽으로 서너 걸음 걸었다. 그러곤 차가 사라지자 곧바로 돌아서 아까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입구엔 ‘막다른길’도 아니고 ‘믹디른길’이라는 색 바랜 표지판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나는 작은 도시에 강의를 왔다. 기차역에 마중 온 선생님의 차로 학교 근처에 오니 1시간이 넘게 남았다. 혼자 주변을 산책하고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곤란해했다. “여긴 볼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시골도 도시도 아니라 어중간해요.” “괜찮습니다. 바람 좀 쐬고 들어갈게요.” “아이고 먼지가 이래 뿌연데?” 다행히 선생님은 수업을 하러..

칼럼읽다 2022.02.10

공부의 쓸모

공부의 쓸모 최준영 책고집 대표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힘든 일이 뭔지 아세요? 정치경제학을 읽는 일이에요. 특히 당신이 쓴 정치경제학.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들(경찰)은 당신이 쓴 정치경제학을 읽지 않을 거예요.” 막 탈고한 을 경찰에 빼앗겨 상심하고 있는 남편 마르크스에게 아내 예니가 건넨 위로의 말이다. 듣고 난 마르크스가 답한다. “그런데 말이오. 정치경제학을 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뭔 줄 아시오? 그건 바로 정치경제학을 쓰는 일이라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들려준 일화다. 상상컨대, 마르크스 부부는 을 읽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처음에는 소수의 추종자들만 읽었지만 점점 힘을 얻게 되자 자본가들도 긴장했고, 을 읽기 시작..

칼럼읽다 2022.02.09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렸다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렸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내가 다니던 여고에는 ‘1111 금지법’이 있었다. 브래지어 위에 끈 형태가 아닌 ‘메리야스’로 불리는 민소매 속옷을 입어야 했다. 브래지어와 끈 형태 민소매 속옷을 함께 입으면 교복에 비친 속옷이 ‘1111’ 형태로 보인다 하여 1111 금지법이라 불렀다. 걸린 학생들은 ‘속옷도 제대로 안 챙겨 입는 날라리’ 취급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남성 교사가 등짝을 때리거나 브래지어 끈을 튕기면서 면박을 주며 성희롱하는 걸 참아야 했다. 당시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그때 수치심을 꿀꺽 삼키는 대신 분노하며 항의했더라면 어땠을까? ‘군인 아저씨’에게 위문편지 쓰는 일도 했다. 선생님은 군인 아저씨들이 나라를 지키는 덕분에 우리가 평안하게 사..

칼럼읽다 2022.02.09

시간을 멈추게 한 느티나무

시간을 멈추게 한 느티나무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해남 두륜산 천년수. 설 쇠고, 나이 혹은 세월의 흐름을 돌아보게 되는 즈음이다. 나이 드는 걸 심드렁하게 느끼는 축이 있는가 하면, 활기차게 받아들이는 축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 됐든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은 세월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는 건 분명하다.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묶어두는 데에 이용했던 나무가 있다. 땅끝 해남의 고찰 대흥사가 깃든 두륜산 마루에 서 있는 ‘천년수(千年樹)’라는 이름의 느티나무다. 산내 암자 ‘만일암’이 있던 폐사지여서 ‘만일암터 천년수’라고도 부른다. 폐사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천년수는 무려 1100년이나 된 큰 나무다. 산림청 보호수로 등록된 느티나무 가운데 수령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래된 나무다. ..

칼럼읽다 2022.02.08

100만명 도시

100만명 도시 윤호우 논설위원 과거 ‘직할시’가 있었다. 서울특별시에 이어 제2의 대도시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부산·대구·인천·대전·광주 등 5개시가 직할시였다. 중앙 정부에서 직접 관할하는 도시라는 뜻이다. 규모가 큰 도시라면 직할시로의 승격을 꿈꿀 만큼 자랑스러운 이름이기도 했다. 시민들도 편지 봉투 주소란의 도시 이름 뒤에 꼭 ‘직할시’라는 명칭을 붙여 다른 도시와 다름을 부각했다. 하지만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직할’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광역시라는 명칭으로 대체됐다. 이후 행정구역은 광역시에 울산이 추가되고, 세종 특별자치시가 신설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제주에는 특별자치도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13일 ‘특례시’라는 새로운 명칭의 대도시가 탄생했다. 인구 100만..

칼럼읽다 2022.02.08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너도 죽는다, 그리고 나도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너도 죽는다, 그리고 나도 김은형 | 문화기획에디터 새해 첫날, 친구와 죽음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신년대담을 나눌 만한 석학은 물론 아니고, 시아버지가 얼마 못 사실 거 같다는 이야기였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데다 지금까지 중증 질환 한번 앓으신 적 없고, 정신은 여전히 오륙십대 자식들보다도 맑은 분인데 소화력을 비롯해 모든 기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게 친구의 말. 평균수명 83년 가운데 거의 십년을 병마와 싸우다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한국인의 생애주기인데 이런 마무리는 모두가 꿈꾸는 결말 아닌가. “맑은 정신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또렷하게 인지하면서 엄청나게 두려워하시거든...

칼럼읽다 2022.02.08

왜 장어는 구워야 맛있을까

왜 장어는 구워야 맛있을까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장어 맛집으로 유명한 한 식당에서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각자 하는 일도 다르지만 모두 요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번 모임의 만찬 요리는 제가 제안을 했는데요, 얼마 전 장어에 관한 짧은 글을 쓰다가 그만 장어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장어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흔히 민물장어라고도 부르는 뱀장어입니다. 뱀장어는 주로 민물에서 생활하지만,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서 잡히기도 하죠. 그런데 이 뱀장어는 알을 낳기 위해 아주 먼 바다로 긴 여정을 떠납니다. 알을 낳으려 바다에서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와는 정반대입니다. 장어의 일생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어찌 그리 먼 바다로 나가 알을 낳고, 그 새끼들은 또 어떻게 그 ..

칼럼읽다 2022.02.07

아파트 블루스

아파트 블루스 서한나 | 보슈(BOSHU) 공동대표· 저자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엘리베이터에는 거울 깬 사람들 시시티브이(CCTV)로 확인했으니 관리사무소로 연락하라는 종이가 있고 지하주차장에는 ‘대소변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퇴근길에 주차장 기둥에서 소변을 보는 중년 남성을 마주치고 자주 큰소리로 시비를 거는 젊은 남성을 만난다. 이웃은 소음과 호흡을 나누는 사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곳에는 나누지 않은 소음을 듣는 이웃이 있다. 어느 밤에는 옆집 사람이 현관을 두드렸다. 참을 수 없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누워 있던 내 몸에서 날숨이 크게 나와 그를 괴롭힌 것일까 내 호흡기를 의심했지만, 그가 모든 집에 돌아가며 항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그의 방문은 내게 더욱 두려운 ..

칼럼읽다 2022.02.07

자유의 모순

자유의 모순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내가 생각하는 미국 보수 정치의 문제 중 하나는 낙태는 무조건 반대하면서 총기 소유는 허용하는 것이다.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든 산모의 건강이 위험하든 배아가 세포분열 중인 단계부터 생명은 그토록 소중한데, 이미 태어난 사람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것은 괜찮다는 말인가? 민간인의 무장해제와 군대와 경찰로의 무력 집중은 근대국가 형성의 기본이다. 어쨌든 어떤 이에게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살아갈 자유가 제약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자유와 자유가 대립하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한 풍경이다. 일단, 재벌 기업가가 주가 하락을 감수하면서도 멸공을 주장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는 이십대 남성을 주 지지층으로 ..

칼럼읽다 2022.02.07

[이우진의 햇빛] 눈송이는 알고 있다

[이우진의 햇빛] 눈송이는 알고 있다 꽁꽁 언 한강에 눈이 내리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극지에서 가져온 얼음 조각을 물컵에 넣으면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며 뭔가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수십만년 동안 차디찬 눈의 세계에 갇혀 있던 기포가 세상에 다시 제 모습을 내보이는 순간이다. 얼음 속의 기포가 터질 때마다 고대 생명체의 숨결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기포는 설원을 지나던 맘모스가 큰 귀를 펄럭일 때 빠져나온 체취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기포는 쥐라기 평원을 누비며 포효하던 사나운 공룡의 거친 숨소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기포는 오랜 여정을 거쳐 극지에 당도한다. 우선 하나의 눈송이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예사롭..

칼럼읽다 2022.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