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이우진의 햇빛] 눈송이는 알고 있다

닭털주 2022. 2. 7. 13:17

[이우진의 햇빛] 눈송이는 알고 있다

 

 

꽁꽁 언 한강에 눈이 내리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극지에서 가져온 얼음 조각을 물컵에 넣으면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며 뭔가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수십만년 동안 차디찬 눈의 세계에 갇혀 있던 기포가 세상에 다시 제 모습을 내보이는 순간이다.

얼음 속의 기포가 터질 때마다 고대 생명체의 숨결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기포는 설원을 지나던 맘모스가 큰 귀를 펄럭일 때 빠져나온 체취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기포는 쥐라기 평원을 누비며 포효하던 사나운 공룡의 거친 숨소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기포는 오랜 여정을 거쳐 극지에 당도한다. 우선 하나의 눈송이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머리 위에 방금 앉은 눈송이는 백만분의 일의 경쟁을 뚫고 내려온 행운아다. 구름 안에서 주변의 수증기나 과냉각 물방울이나 다른 얼음 결정을 먹으면서 백만 배나 덩치를 키운 것이다.

눈송이에는 나무처럼 빈 곳이 많다.

나뭇가지가 팔을 벌려 그 안에 새와 나비가 숨 쉬는 공간을 넓혀 놓은 것처럼, 눈송이도 얼음 결정을 바깥으로 죽죽 뻗어내서 그 안에 기체들이 맘껏 드나들게 한다. 눈송이는 90% 이상이 기체라서, 적설이 10라고 해도 강수량으로 환산하면 1가 채 안 되는 것이다.

낙하하는 눈송이는 이미 쌓인 눈의 결정 모양에 맞추어,

마치 테트리스 게임에서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여기저기 들쑥날쑥 쌓인다.

지상에 내려온 다음에도 눈송이끼리의 경쟁은 계속된다.

작은 눈송이에서 기화한 수증기는 큰 눈송이에 달라붙으며,

큰 눈송이는 살이 통통해지고 작은 눈송이는 쪼그라든다.

별이나 바늘 결정이 엉겨 붙은 커다란 눈송이도 볼록 튀어나온 곳에서 기화한 수증기가 움푹 파인 곳으로 달라붙으며 점차 둥그스름하게 변해간다.

쌓인 눈도 아래쪽 온도가 높은 곳에서 기화한 수증기가 위쪽 온도가 낮은 곳으로 이동하여 달라붙는다. 눈송이끼리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동안 적설은 얼음으로 변해가고, 눈송이에 포획된 공기가 얼음 안에 밀봉된 채 기포가 된다.

매년 차곡차곡 쌓인 적설을 파 들어갈수록 더 연식이 오래된 기포를 만날 수 있다.

둥근 관을 만년설 속으로 밀어 넣어 뽑아낸 빙하 코어는 자연이 묻어둔 날씨의 타임캡슐이다. 그 안에 갇힌 기포를 순차적으로 분석하면 기온, 강수량, 이산화탄소 농도를 비롯한 고대 기후의 연대기를 얻게 된다.

한때 지구가 따뜻했던 시기에 그린란드의 두꺼운 얼음층이 모두 녹아내려 해수면이 몇 미터나 솟아오른 적이 있었다는 것은, 빙하에 묻혀 있던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온난화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섬뜩한 경고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 때 서부전선을 넘나들다 알프스 설산에 갇힌 기포는 전쟁 당시 기압계가 변해, 북대서양의 해풍이 전장에 차갑고 습한 날씨를 몰고 와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군인들은 북해에서 알프스에 이르기까지 참호를 파고 대치하며 적진의 공세에 맞섰다.

비가 오면 비좁은 구덩이 밑에는 진흙탕이 흘렀다.

갖가지 오물에 며칠이고 발을 담그는 동안,

병사들은 적의 포탄과 함께 추위와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목숨을 잃었다.

고려시대 은화를 주조할 때 빠져나간 납 성분의 기체는 어딘가로 날아가 기포가 되어, 유통된 통화량의 규모를 기록해 놓았을 것이다.

조선은 한때 17세기 소빙기와 겹쳐 폭설과 우박이 자주 내린데다 가뭄이 심했다.

싸늘하고 메마른 산야를 지나던 기체는 온대저기압에 실려 북쪽으로 날아가 눈송이와 함께 기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만년설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태백산맥에서 북으로 뻗어나간 캄차카반도 준봉 어딘가에는 그 기포가 만년설에 파묻혀 당시 흉작과 역병에 내몰렸던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