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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너의 몫이라고

여름은 너의 몫이라고 수정 2025.06.19 21:01 최정화 소설가 그는 나를 알토라고 부르지만, 내 이름은 벅이다. 태어난 지 다섯 달쯤 지났을 때 나를 입양한 보호자가 지어준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그는 조그만 내가 귀엽다며 집으로 데려갔지만 희귀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길에 버렸다. 집 안에서 생활하는 데 길들여진 고양이가 길 위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춥다는 사실을 세 살에 처음 알았고, 길에서 태어난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적응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편이다. 나는 사시사철 감기에 걸려 있고, 털은 뭉쳐 있고, 귀에는 진드기가 가득하며, 뱃속에는 작은 비닐과 플라스틱 조각들이 들어 있다. 내게는 이빨이 없다. 구내염에 걸린 탓에 이를 모두 뽑..

책이야기 2025.06.24

빚과 실

빚과 실 수정 2025.06.22 22:12 복길 자유기고가 말할 수 있는 빚이 있고, 말할 수 없는 빚이 있다. 말할 수 있는 빚은 ‘반은 은행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집을 소개하거나, 운영에 부침을 겪는 업주가 희망을 찾을 때의 것이다. 겸손하고, 성실하고, 명예롭다. 반면 말할 수 없는 빚은 말해진 적 없기에 예를 들 수가 없다. 생존이나 중독에서 기인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 숨기고 감추느라 어둠 속에서 축축해진 그것들의 이미지는 오만하고, 나태하고, 굴욕적이다. 말할 수 없는 빚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나는 지극히 사적인 채무에 대해서만 말하자고 다짐했다. 병든 몸으로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얻은 괴로운 부채,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빚을 내야 했던 슬픈 밤, 빚을 갚으며 많은 사..

칼럼읽다 2025.06.23

살다보니 알겠더라 조관희

살다보니 알겠더라조관희 떠오르는 수 많은 생각들 속에한 잔의 커피에 목을 축인다 살다 보니 긴 터널도 지나야 하고안개 낀 산 길도 홀로 걸어야 하고바다의 성난 파도도 만나지더라 살다 보니 알겠더라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스치고 지나야 하는 것들은꼭 지나야 한다는 것도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고남아야 할 사람은 남겨지더라 두 손 가득 쥐고 있어도어느샌가 빈손이 되어 있고빈손으로 있으려 해도그 무엇인지를 꼭 쥐고 있음을 소낙비가 내려 잠시 처마 밑에피하다 보면 멈출 줄 알았는데그 소나기가 폭풍우가 되어온 세상을 헤집고 지나고서야멈추는 것임을 다 지나가지만그 순간은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지나간다 모두 다 떠나는 계절저무는 노을힘겨운 삶마저도 흐르는 것만이 삶이 아니다저 강물도, 저 바람도저 구름도, 저 노을..

시를읽다 2025.06.23

부글부글·풍덩…감정에 색깔 입히는 의성의태어 [.txt]

부글부글·풍덩…감정에 색깔 입히는 의성의태어 [.txt]신견식의 세계 마음 사전 추상적 감정 구체화하는 의성의태어 한국·아시아·아프리카어에 많아 복잡한 감정의 결 살려 생동감 더해 수정 2025-05-24 17:51등록 2025-05-24 02:00 ‘부글부글’은 원래 액체가 계속 야단스럽게 끓어오르는 소리나 모양을 일컫는데 울화나 분노, 언짢은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 모양도 빗댄다. 게티이미지뱅크 언어 기호의 자의성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주창한 이래로 널리 알려진 언어학의 기본 개념이다. 예컨대 한국어 ‘나무’, 중국어 ‘木’, 영어 ‘tree’의 말소리는 이것이 일컫는 말뜻과 아무 상관이 없다. 추상명사로 가면 그 정도는 더한데 ‘사랑’, ‘愛’, ‘love’가 왜 하필 그 뜻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문장놀이 2025.06.22

기억을 짓는다 [크리틱]

기억을 짓는다 [크리틱]수정 2025-06-19 13:37 등록 2025-06-18 19:23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 설치된 서도호의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2024) 작품 내부를 관객들이 걷고 있다. 사진 장민경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영국을 여행 중인 지인이 안부를 물으며 책 한권을 선물로 보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김금희 작가의 최근작을 택배로 받게 됐다. 창경궁 대온실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렸다. 일제 강점기 창경원으로 격하된 근대의 전시 공간에 조성된 대온실은 20세기 초 식민 권력을 증언하는 건축물이다. 실재하는 공간과 직조된 소설에서 주인공은 대온실 보수 공사에 참여해 수리 기록을 담당하며 과거와 맞닥뜨리..

칼럼읽다 2025.06.21

꿀벌의 분가

꿀벌의 분가 수정 2025.06.18 22:25 이은희 과학저술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꿀벌 집단에서 개체 수를 전담하는 것은 여왕벌이다. 여왕벌의 산란 속도는 경이적이어서, 평균 1분당 1개꼴로 하루에만 약 1500개에 달하는 알을 낳는다. 아무리 일벌의 수명이 6주에서 최대 6개월 남짓으로 길지 않다고 해도, 이 정도 속도라면 곧 하나의 벌집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이렇듯 밀집도가 올라가면, 이들 중 일부는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며 자연스럽게 분가를 한다. 꿀벌의 분봉은 보통 5월을 전후한 봄에 이루어진다. 식물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름 전에 새집을 만들어 토대를 다지기 위해서다. 분봉 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다음 세대를 이끌 새로운 여왕벌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칼럼읽다 2025.06.20

쓰디쓴 아메리카노

쓰디쓴 아메리카노 수정 2025.06.19 21:02 이명희 논설위원 지난 9일 서울 여의도에서 직장인들이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최근 5년간(2019∼2023년) 우리 국민의 음료 섭취 현황’을 보면 20대 이상 모든 연령대가 가장 많이 마신 음료는 아메리카노다. 연합뉴스 작곡가 베토벤은 매일 아침 커피콩 60알을 내린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커피광들에게 ‘60’은 ‘베토벤 넘버’로 불린다. 브람스 역시 아침마다 진한 커피를 마신 걸로 유명하다. 바흐가 독일 라이프치히 커피하우스에서 처음 발표한 ‘커피 칸타타’ 마지막은 커피를 예찬하는 합창이다. 성 이니셜을 따 ‘3B’로 부르는 이 세 사람은 커피광들이다. 국내로는 커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시인 이상이..

칼럼읽다 2025.06.20

내 평생소원, 표준어를 공통어로 바꾸는 것 [말글살이]

내 평생소원, 표준어를 공통어로 바꾸는 것 [말글살이]수정 2025-06-19 18:49 등록 2025-06-19 17:14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네 평생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것이라고 하겠다.(거짓말) 말 공부하는 선생이라는 직업인으로서 평생소원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 내 평생소원은 두가지다. 첫째는 대학의 상대평가를 없애는 것. 대학에 있으면서 뭐든지 들어줄 테니 소원 하나만 말해보라고 하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상대평가를 없애는 것이라고 하리라.(이 소박한 꿈을 이루기가 참 어렵다.) 엊그제 졸업을 앞둔 가연씨가 불쑥 꺼낸 말. “제가 졸업하고 나가더라도 대학이 절대평가로 바뀌면 좋겠어요. 돌이켜보니 옆 친구들과..

연재칼럼 2025.06.19

교수님만 모른다…과제는 AI가 해준다는 걸 [왜냐면]

교수님만 모른다…과제는 AI가 해준다는 걸 [왜냐면]수정 2025-06-18 18:53 등록 2025-06-18 17:40 신두관 | 중앙대 기계공학부 1학년 많은 대학생이 보고서의 대부분을 인공지능(AI)으로 작성한다. 주제만 간단히 입력하면 몇분 안에 그럴듯한 글이 완성되고, 문장 구성도 매끄럽다. “다들 그렇게 해요. 교수님도 자세히 보진 않잖아요. 표절 검사만 넘기면 문제없어요.” 한 학생의 말은 오늘날 대학가에 퍼진 분위기를 정확히 보여주는 단면이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글쓰기는 새로운 능력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챗지피티, 퍼플렉시티, 구글 제미니(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은 주제만 던지면 순식간에 수천자 분량의 글을 만들어낸다. 처음엔 참고 목적으로 사용하던 인공..

칼럼읽다 20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