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누가 그런 ‘안배’ 해달랬나

닭털주 2022. 4. 26. 10:09

누가 그런 안배해달랬나

 

김영희 | 논설위원실장

 

 

안배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나 관계자들이 인사에 대해 직설적으로 내놓는 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다. “윤 당선자는 이벤트 인사, 패션 인사는 절대 안 할 것.”(313일 윤 당선자 핵심관계자) “저는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할당이나 안배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410일 윤 당선자) “새로이 소개해드릴 인사들에 대해서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트로피 인사는 안 할 것.”(419일 배현진 당선자 대변인)

 

용어는 쓰는 사람의 인식을 반영한다.

알맞게 배분한다는 사전적 의미는 이런 발언의 반복 속에 자질도 되지 않는데 나눠먹기나 구색 맞추는 행위로 변질되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런 안배 하라 했나.

윤석열 1기 내각의 다양성 부족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

인수위원회 구성 당시 여성은 극소수, 서울대 출신이 3분의 2에 육박할 때만 해도 당장 일해야 하니 그럴 수도 있지라고 했던 이들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를 포함한 19명 중

여성은 3, 서울대 출신 10, 60대 이상 13명이다.

“30대 장관이 많이 나올 것이란 발언을 지키기가 어려웠다면 노력했는데 찾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은 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이대로라면 여성 장관 비율은 16.7%,

유엔여성기구와 국제의회연맹이 193개국을 조사해 발표하는 위민 인 폴리틱스’ 2021년 기준 자메이카, 나우루와 함께 114위가 된다.

24명 장관 중 30대가 7, 여성이 14명인 칠레까진 아니더라도 좌파든 우파든 남녀동수내각이 속속 나오는 시대에 한국은 갈라파고스를 자처하는 셈이다.

또래 한 지인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말했다.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고 했잖냐.

그랬다면 인선에서 어떻게든 보여주려 노력을 했어야지,

공정하게 실력 갖춘 이들을 모신 결과라는 말만 한다.

그럼 여성은 열등하다는 얘기냐.”

과거 구조적 차별 탓에 리더급이 없을 뿐 아래는 달라졌다고 할지 모르겠다.

정부나 기업이나 수십년째 틀어온 레퍼토리다. 나와 내 또래가 사회에 나오던 30년 전에도 엄마 세대와 달리 능력만 있으면 성공하는 시대라는 말은 정도의 차이일 뿐 지금과 매한가지였다. 여성이 승진에 탈락하면 그 분야 경험이 없어서인데, 남성들에겐 경험이 중요한가, 리더십 있으면 되지가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노르웨이가 2003년 세계 최초로 공기업과 상장기업에 여성임원할당제를 도입할 때 나온 예측이 지금까지 추세라면 40% 비율이 되는 데 200년이 걸릴 것이었다.

 

세상은 그리 나이브한 생각을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는다. 돈이 가리키는 방향만 봐도 안다. 기업들에 ESG(환경·사회·투명경영) 광풍을 몰고 온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2012월 미국뿐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기업 투자에도 이사회 다양성을 원칙으로 적용하겠다고 천명했다. 올해 초 래리 핑크 회장은 자신의 방향이 정치나 이념이 아니라 공동번영을 위한 자본주의의 수단이라고 밝혔다.

하물며 효율성을 좇는 돈의 흐름이 이럴진대, 국민의 다양한 삶을 반영한 의제를 결정짓는 정치의 영역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여성과 청년의 과소대표성을 극복하는 일은 수십년간 미뤄온 민주주의의 절박한 과제이지, 시혜성 안배의 대상이 아니다.

50대 이상 남성 중심 정치구조가 공고한 한국에선 정치개혁의 의미 또한 갖는다.

26살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검찰 수사권 분리 강행, 꼼수 탈당 같은 민감한 사안 고비마다 민주당에 가장 필요한 목소리를 내며 균열을 내는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만 다양성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이은형 국민대 교수는 조직문화가 포용적이면 +효과를 내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 다양성을 급하게 이식하면 -의 효과를 낸다는 연구가 많다. 경청할 준비나 정책을 반영하는 문화가 없으면 갈등을 키울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한다. 윤 당선자 쪽에 의한 안배라는 단어의 오염이 사회적으로도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몇년간 커졌다는 세대 갈등, 젠더 갈등에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할당이나 안배 자체가 아니라, 포용적이지 않은 사회와 여성과 청년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정치다.

다양성을 배제한 채 각종 찬스와 이해충돌로 얼룩진 인선을 가리는 허울이 능력이라면, 그런 능력은 필요 없다. 미래지향적일 순 더더욱 없다. 남녀동수내각을 선보인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이유를 묻자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 답해 화제가 된 적 있다.

지금, 2022년이다.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