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지금 여기서, 나이 듦을 상상한다 [서울 말고]

닭털주 2024. 4. 1. 09:18

지금 여기서, 나이 듦을 상상한다 [서울 말고]

수정 2024-03-31 18:57 등록 2024-03-31 14:28

 

김희주 | 양양군도시재생지원센터 사무국장

 

 

미래를 상상하는 힘.’ 우주여행같이 희망찬 내일의 비전이 연상된다.

하지만 요즘 이 문구를 떠올리는 순간은 전혀 다르다.

오일장이면 읍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노인들을 볼 때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중에 공부란 머릿속에 지식을 쑤셔 넣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라는 글을 보고 감탄했었다.

시골에 살면서 노인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자주 본다.

지금까지 막연히, 다소 뿌옇게 보았던 나이 듦에 대해 좀 더 해상도가 높아졌다.

신체의 노화는 개인의 몸에서 시작되지만 나이 듦은 결코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읍내에서 허리가 굽은 채 노인 유모차라 불리는 보행 보조기를 밀고 느리게 건널목을 건너는 노인들을 자주 본다. 몇 해 전 지중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인도 폭은 줄이고 도로 폭은 넓혀 주·정차 공간을 확보했다.

좁아진 인도를 걷는 노인의 보행 환경은 더 불편해졌다.

장날 전통시장 근처 버스 정류장에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허리와 어깨가 굽은 채 작은 몸집으로 웅크리고 앉은 노인들을 자주 본다.

자주 오지 않는 데다 낡은 시내버스는 이들을 태우고 너무 빠르게 달린다.

운전기사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인력난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배차 간격이 줄어든 버스 기사들이 화장실도 못 들르고 바로 다음 배차를 소화하는 등 시간에 쫓긴 채 운행하면서 승객 안전이 뒷전으로 밀린다.

 

육체의 쇠락으로 걸음이 느려지고 주위 사물을 인지하기 어려운 것은 개인에게 일어나는 변화다. 하지만 좁은 인도에서 장애물을 피해 보행 보조기를 밀고, 신호가 없는 건널목과 빠르게 달리는 차 사이에서 위험하게 길을 건너고, 낡은 시내버스가 너무 빠르게 달리고 너무 급하게 정차해 가뜩이나 근력 없는 몸이 휘청거리는 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 풍경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내게도 다가올 미래라는 것을 서울에 살 때, 젊었을 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인생은 타이밍, 부동산은 타이밍, 연애는 타이밍.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수식이지만, 타이밍은 중요하다.

삼십 대 초반에 여행 중 충동구매로 집을 샀고, 삼십 대 중반에 이주해 사십 대가 되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청년기를 서울에서 보냈기에 이 나이에 시골에서 살면서 보고 겪는 경험과 사유가 소중한 공부인 것 또한 타이밍의 문제다.

고령화 지수가 높은 양양에서 사십 대는 상대적으로 청년이지만 사회적 인식으로는 중년에 접어드는 시기다. 지금 이곳에서 노인을 자주 접하면서 나이 듦에 대해 좀 더 선명하게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늙지 않았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버스를 타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20년은 더 운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좁은 인도에서 보조기를 끌거나 많이 흔들리는 버스를 타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당장 주차가 편하니 도로를 넓혀 인도가 좁아진 상황에 무심하고,

버스를 자주 타지 않으니 노후 차량이나 난폭 운전에 무감해도 되는 게 아니다.

 

세상의 해상도는 곧 가시화의 문제다.

서울에서도 노인은 있었지만 비가시화된 존재였다.

실제로 전체 인구 대비 고령 인구의 비율이 적어서, 너무 많은 사람 속에 있어 군중이 아닌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해서, 아직 젊었기에 내 삶과 연관 짓지 못해서 등 여러 이유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보인다.

,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본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모른 척 할 수도,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지방소멸의 현장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건 디스토피아 묘사를 닮아 종종 씁쓸하다. 그래도 이웃의 모습에 나를 투영해 그의 일을 우리의 일로 여길 때, 내가 살고 싶은 미래를 위한 지금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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