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919

꿈이 없으면 리얼리스트도 아니다

꿈이 없으면 리얼리스트도 아니다 조형근 | 사회학자 “나 경찰 아니야. 서라고. 이야기 좀 해!” 노인이 숨을 헐떡였다. 우리는 줄행랑을 멈췄다. “나도… 지지한다고….” 가쁜 숨 내쉬는 노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1987년 11월 말, 서울 변두리 어느 골목이었다. 직선제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선배와 함께 ‘민중후보’ 백기완의 포스터를 골목 여기저기 붙이고 있었다. 누군가 따라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을 쳤다. 아직은 군사정권 치하,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쫓아온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목이 멘 채 포스터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 그 노인은 얼마 만의 ‘커밍아웃’이었을까? 해방 정국을 이끌던 진보좌파 정치 세력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남한에서..

칼럼읽다 2022.02.11

잘 얼려야 맛도 좋다

잘 얼려야 맛도 좋다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굴튀김을 만들기 위해 냉동고에 얼려 두었던 굴을 꺼내 해동시켰습니다. 지난주 시장에서 사온 신선한 굴로 요리를 하고 조금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굴튀김의 맛이 영 별로입니다. 냉동된 재료라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냉동식품은 식감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습니다. 냉동하는 과정에서 식재료의 조직이 파괴되기 때문인데요, 더 정확히는 식물이나 동물을 구성하는 세포가 파괴됩니다. 물은 특이하게도 얼어서 고체가 되면 부피가 팽창합니다. 다른 물질들은 액체에서 고체 상태가 되면 부피가 줄어드는 것과는 정반대이죠. 10% 정도 부피팽창이 일어나는데, 이로 인해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세포막 등이 ..

칼럼읽다 2022.02.10

위언과 위행

위언과 위행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위언은 산림에서 나오고, 높은 행적 책 속엔 드무네. 산인은 원래 강직하니 후학이 감히 따를 수 있을까.” 어우 유몽인이 남명 조식을 기리며 쓴 시이다. 여기서 위언이란 조식이 올린 상소문에서 당시 수렴청정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문정왕후를 가리켜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다”고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를 본 명종이 격노하여 불경죄로 처벌하려 한 것도 당연하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위언과 위행을 하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위행은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위언(危言)과 위행(危行)은 위험을 무릅쓰고 준엄하게 하는 말과 행동이다. 의와 명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려야 마땅하다는 것이 유가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아무리 옳다 하더..

칼럼읽다 2022.02.10

막다른 길 애호협회

막다른 길 애호협회 이명석 | 문화비평가 “거긴 막혀 있어요. 길이 없어요.” 선생님은 나를 차에서 내려준 뒤에도 쉽게 떠나지 못했다. “네. 걱정 마세요.” 나는 가짜 미소를 지으며 큰길 쪽으로 서너 걸음 걸었다. 그러곤 차가 사라지자 곧바로 돌아서 아까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입구엔 ‘막다른길’도 아니고 ‘믹디른길’이라는 색 바랜 표지판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나는 작은 도시에 강의를 왔다. 기차역에 마중 온 선생님의 차로 학교 근처에 오니 1시간이 넘게 남았다. 혼자 주변을 산책하고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곤란해했다. “여긴 볼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시골도 도시도 아니라 어중간해요.” “괜찮습니다. 바람 좀 쐬고 들어갈게요.” “아이고 먼지가 이래 뿌연데?” 다행히 선생님은 수업을 하러..

칼럼읽다 2022.02.10

공부의 쓸모

공부의 쓸모 최준영 책고집 대표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힘든 일이 뭔지 아세요? 정치경제학을 읽는 일이에요. 특히 당신이 쓴 정치경제학.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들(경찰)은 당신이 쓴 정치경제학을 읽지 않을 거예요.” 막 탈고한 을 경찰에 빼앗겨 상심하고 있는 남편 마르크스에게 아내 예니가 건넨 위로의 말이다. 듣고 난 마르크스가 답한다. “그런데 말이오. 정치경제학을 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뭔 줄 아시오? 그건 바로 정치경제학을 쓰는 일이라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들려준 일화다. 상상컨대, 마르크스 부부는 을 읽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처음에는 소수의 추종자들만 읽었지만 점점 힘을 얻게 되자 자본가들도 긴장했고, 을 읽기 시작..

칼럼읽다 2022.02.09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렸다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렸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내가 다니던 여고에는 ‘1111 금지법’이 있었다. 브래지어 위에 끈 형태가 아닌 ‘메리야스’로 불리는 민소매 속옷을 입어야 했다. 브래지어와 끈 형태 민소매 속옷을 함께 입으면 교복에 비친 속옷이 ‘1111’ 형태로 보인다 하여 1111 금지법이라 불렀다. 걸린 학생들은 ‘속옷도 제대로 안 챙겨 입는 날라리’ 취급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남성 교사가 등짝을 때리거나 브래지어 끈을 튕기면서 면박을 주며 성희롱하는 걸 참아야 했다. 당시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그때 수치심을 꿀꺽 삼키는 대신 분노하며 항의했더라면 어땠을까? ‘군인 아저씨’에게 위문편지 쓰는 일도 했다. 선생님은 군인 아저씨들이 나라를 지키는 덕분에 우리가 평안하게 사..

칼럼읽다 2022.02.09

시간을 멈추게 한 느티나무

시간을 멈추게 한 느티나무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해남 두륜산 천년수. 설 쇠고, 나이 혹은 세월의 흐름을 돌아보게 되는 즈음이다. 나이 드는 걸 심드렁하게 느끼는 축이 있는가 하면, 활기차게 받아들이는 축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 됐든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은 세월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는 건 분명하다.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묶어두는 데에 이용했던 나무가 있다. 땅끝 해남의 고찰 대흥사가 깃든 두륜산 마루에 서 있는 ‘천년수(千年樹)’라는 이름의 느티나무다. 산내 암자 ‘만일암’이 있던 폐사지여서 ‘만일암터 천년수’라고도 부른다. 폐사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천년수는 무려 1100년이나 된 큰 나무다. 산림청 보호수로 등록된 느티나무 가운데 수령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래된 나무다. ..

칼럼읽다 2022.02.08

100만명 도시

100만명 도시 윤호우 논설위원 과거 ‘직할시’가 있었다. 서울특별시에 이어 제2의 대도시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부산·대구·인천·대전·광주 등 5개시가 직할시였다. 중앙 정부에서 직접 관할하는 도시라는 뜻이다. 규모가 큰 도시라면 직할시로의 승격을 꿈꿀 만큼 자랑스러운 이름이기도 했다. 시민들도 편지 봉투 주소란의 도시 이름 뒤에 꼭 ‘직할시’라는 명칭을 붙여 다른 도시와 다름을 부각했다. 하지만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직할’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광역시라는 명칭으로 대체됐다. 이후 행정구역은 광역시에 울산이 추가되고, 세종 특별자치시가 신설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제주에는 특별자치도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13일 ‘특례시’라는 새로운 명칭의 대도시가 탄생했다. 인구 100만..

칼럼읽다 2022.02.08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너도 죽는다, 그리고 나도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너도 죽는다, 그리고 나도 김은형 | 문화기획에디터 새해 첫날, 친구와 죽음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신년대담을 나눌 만한 석학은 물론 아니고, 시아버지가 얼마 못 사실 거 같다는 이야기였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데다 지금까지 중증 질환 한번 앓으신 적 없고, 정신은 여전히 오륙십대 자식들보다도 맑은 분인데 소화력을 비롯해 모든 기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게 친구의 말. 평균수명 83년 가운데 거의 십년을 병마와 싸우다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한국인의 생애주기인데 이런 마무리는 모두가 꿈꾸는 결말 아닌가. “맑은 정신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또렷하게 인지하면서 엄청나게 두려워하시거든...

칼럼읽다 2022.02.08

왜 장어는 구워야 맛있을까

왜 장어는 구워야 맛있을까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장어 맛집으로 유명한 한 식당에서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각자 하는 일도 다르지만 모두 요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번 모임의 만찬 요리는 제가 제안을 했는데요, 얼마 전 장어에 관한 짧은 글을 쓰다가 그만 장어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장어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흔히 민물장어라고도 부르는 뱀장어입니다. 뱀장어는 주로 민물에서 생활하지만,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서 잡히기도 하죠. 그런데 이 뱀장어는 알을 낳기 위해 아주 먼 바다로 긴 여정을 떠납니다. 알을 낳으려 바다에서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와는 정반대입니다. 장어의 일생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어찌 그리 먼 바다로 나가 알을 낳고, 그 새끼들은 또 어떻게 그 ..

칼럼읽다 2022.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