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921

속에 담긴 속담들

속에 담긴 속담들 오은 시인 틈나는 대로 국어사전을 펼친다. 글이 무섭게 잘 풀릴 때나 글이 도무지 안 풀릴 때, 시간을 채우고 싶을 때나 시간을 죽이고 싶을 때,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어김없이 국어사전을 펼친다. 아무 때나 펼치는 셈이다. 숨을 참고 있을 때조차 공기가 있는 것처럼,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처럼, 그것은 언제든 열어볼 수 있게 내 침대 옆에 놓여 있다. 단어를 익힐 때 나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단어의 뜻 살피기. 아는 단어는 재확인의 과정이 필요하다. 단어의 첫 뜻만 아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다양한 뜻을 한 가지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놀라다’의 뜻이 네 가지나 된다는 걸 알았다. 무서울 때나 감동할 때나 기가 ..

칼럼읽다 2022.02.19

진정한 승부

진정한 승부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누가 뭐래도 숙부님은 오직 백성을 위하는 분입니다. 불가피하게 그 앞길을 막는 자들을 처단하려 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 불가피함을 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느니라. 그건 힘으로 의를 짓밟는 자들의 변명이다. 만일 네가 큰일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작고 힘없는 자라면 어떻겠느냐.” 드라마 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변호하자 정몽주가 답하는 장면이다. 불가피한 일을 감행하지 않고는 현실의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긴 이방원은 결국 ‘큰일’을 위해 스승 정몽주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훗날 정도전마저 제거해 버리고 왕위에 오른다. 부친을 거역하고 스승과 친지들을 가차 없이 죽인 승부사 이방원. 드라마의 서두는 그가 스스로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정변, 숙청을 감행하는 괴물이..

칼럼읽다 2022.02.18

4대강의 멈춘 시간

4대강의 멈춘 시간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너도나도 쓰다 보면 자리잡는 말들이 있다. 치킨과 맥주를 합쳐 부르는 ‘치맥’과, 4대강의 ‘녹조라떼’라는 말이 그렇다. 두 신조어는 한국적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인데 치맥은 한류의 자부심이 은근히 밴 말이지만 ‘녹조라떼’는 어디 내놓기엔 부끄러운 말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지난 8일 낙동강과 금강 주변의 노지 재배 농산물에서 녹조가 품고 있는 독소인 마이크로시스틴이 검출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4대강 사업의 환경 훼손은 ‘녹조라떼’라는 말에 응축되어 있고, 라떼는 우유가 들어간 음료로 농도가 진하다. 보로 막힌 4대강은 녹차 수준이 아니라 녹차라떼만큼이나 진하고 묵직하게 강을 뒤덮는다. 한강을 수계로 삼는 수도권에서 콸콸 잘 나오는 수돗물을 먹..

칼럼읽다 2022.02.18

안네의 밀고자

안네의 밀고자 최민영 논설위원 누가 은신처의 안네 프랑크 가족을 밀고했을까. 전직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중심이 된 전문 조사팀이 6년간의 조사 끝에 같은 유대인 출신의 공증인 아르놀트 판덴베르크가 밀고자라고 밝혔다. 유대인 조직의 일원으로 동족들의 비밀주소 목록 접근권을 가진 그가 정보를 나치에 넘겼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암스테르담의 한 건물에서 2년간 숨어지낸 과정을 기록해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한 .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가던 일가족은 누군가의 밀고로 강제수용소로 잡혀가 아버지 오토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초였다. 그동안 거론된 용의자는 30여명으로, 가족과 가까운 인물일 것으로 짐작은 돼 왔다. 그런데도 판덴베르크가 밀고자로 거론되지 않은 배경..

칼럼읽다 2022.02.17

[김누리 칼럼] 20대 대선과 대한민국의 미래

[김누리 칼럼] 20대 대선과 대한민국의 미래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20대 대선의 공식 선거전이 막을 올렸다. ‘최악 중에 최악’을 뽑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혹평 속에 어떤 열기도, 희망도, 감동도 없는 이상한 선거가 진행 중이다. 모두 후보들이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투덜대지만, 진짜 문제는 후보들에게 미래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대전환의 시대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20대 대선은 세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번 선거는 대한민국 새 100년의 첫번째 대선이다. 1919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후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이 나라는 근대국가가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 비극을 모조리 겪었다. 식민의 역사..

칼럼읽다 2022.02.16

잘 섞음의 원리

잘 섞음의 원리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요리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섞음’일 것입니다. 여러 식재료들을 알맞게 준비하고 잘 섞어주면서 최상의 맛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요리이기 때문입니다. 식재료가 고체라면 서로 섞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액체 상태인 경우라면 조금은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과학에서는 ‘Likes dissolve likes’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해보면 ‘비슷한 것들은 비슷한 것들을 녹인다’ 정도가 되겠네요. 액체에 다른 어떤 것을 녹일 때 서로 비슷한 성질이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잘 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과학자들이 서로 비슷한 것들을 분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친수성과 친유성입니다. 친수성이란 물과 친한 성질,..

칼럼읽다 2022.02.16

선명한 메아리

선명한 메아리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 꾹꾹 눌러가며 원고지를 메꾸던 일은 한참 전부터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얀 종이를 앞에 놓고 세심하게 연필을 깎던 글쓰기 전 리추얼 역시 “글 쓸 때 좋은 음악” 정도의 플레이리스트를 찾는 것이 대신합니다. 준비가 되면 문단을 완성할 때마다 글자 수를 세어가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나름의 주장을 담은 모여진 문장들이 네트워크를 타고 전해지면 그 이후의 몫은 읽는 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쌓인 글들이 활자로 번듯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상상하면 소심한 성격에도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글을 쓰는 행위는 온전히 혼자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작은 방에 앉아 빈 화면을 바라보다 문득 쓰는 이에게 즐거..

칼럼읽다 2022.02.16

'진중권 저널리즘'의 막장

'진중권 저널리즘'의 막장 [取중眞담] "가문 대표해 사과합니다"라는 진중권은 누가 키웠나 22.02.15 18:12l최종 업데이트 22.02.15 18:12l박정훈(twentyrock) '진중권'은 우리 언론이 사랑하는 이름이다. 특히 보수언론은 진중권씨의 페이스북을 출입처로 삼았다. 매우 정파적인 그의 주장은 객관·중립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힘을 얻었다. 과거 진보 진영의 '입'으로 활동한 사람이, '조국 사태' 이후 현 정권과 진보 진영 전반을 비난하고 있다는 서사 덕분이었다. 보수언론과 진씨는 일종의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 언론은 진씨의 페이스북 글을 이용해서 쉽게 기사를 쓰면서 조회수를 확보하고, 진씨는 주목을 받으며 '정치 평론가'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식이다. 그렇게 온라인 지면이 '진중..

칼럼읽다 2022.02.16

마을의 운명도 사람의 성격이 된다

마을의 운명도 사람의 성격이 된다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서울에서 40여년, 런던에서 10년6개월 살았다. 비인가 대안학교 교장 노릇 하느라 최근 5년간 산골 생활을 했다. 그 경험이 사물을 달리 보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도회지 사람들은 15세기 사람들과 비슷하다. 자신이 ‘평면 지구’ 위에 사는 것으로 알았기에 먼바다로 항해하면 추락사할 거라 믿었던 중세인들 말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에 ‘탈서울’이란 곧장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로 각인돼 있다. 시골에 살면 생활의 편리를 돕는 망에서 멀어진다. 우리 선고리 마을에서는 관정 물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문제는 갈수기에 발생한다. 눈이 오지 않는 겨울철이나 강우량 적은 계절에 수량이 부족해서 며칠씩 물이 끊긴다. 동네 방송 하기 전 마을 이장의 목소리 가다듬..

칼럼읽다 2022.02.15

백기완 선생님 1주기: 죽음 뒤에도 삶이 있음을

백기완 선생님 1주기: 죽음 뒤에도 삶이 있음을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로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민족사진연구회 제공 [왜냐면] 김중배 | 뉴스타파함께재단 이사장·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아가는 삶이 도리어 뜨거운 이름을 남기는가! 백기완 선생님, 그분을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감동이었습니다. ‘이름’만이 아니라 ‘사랑’도 ‘명예’도 남김 없이 노나메기의 새날을 열어내고자 했던 ‘싸움 선비’인 그분의 이름은 더욱 떠올랐고 새끼에 새끼를 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하는 벗들을 무리 짓게 했습니다. ‘통일꾼’ ‘민주꾼’ ‘민중꾼’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스스로 떠올렸던 ‘장산곶매’와 ‘버선발’ 그리고 ‘노나메기’..

칼럼읽다 2022.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