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919

분노와 존엄의 대결

분노와 존엄의 대결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진실이 힘을 잃고 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들조차 조롱받는다. 정치판은 그 극단을 보여준다. 편가르기가 정치의 본질이라면 지금 대선처럼 무논리, 반이성이 판치면 결국 분노동원 세력이 축배를 들 것이다. 사바나의 자연상태에서 메타버스 인공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불확정성이다. 정글에선 사자가 달려오는 것보다 저편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더 무섭다. 무지는 불안의 원천이면서 자유의 약탈자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그곳으로 갈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헤겔이 자유를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말한 까닭이다. 문제는 앎이 커질수록 자유만이 아니라 무지도 확장된다는 것이다. 많이 아는 사람은 ..

칼럼읽다 2022.02.15

비인간화의 늪

비인간화의 늪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들입니다. 뭐하러 개, 돼지들에게 신경 쓰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 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영화 의 수많은 말들 중에서 스크린을 찢고 나온 최고의 명대사라 할 만하다. 이 대사는 원래 극중 유력 신문의 논설위원이 비리 기업의 총수를 안심시키기 위해 던진 멘트였다. 쌍둥이 세계인가? 그즈음 우리는 기자들 앞에서 거의 똑같은 말을 했다가 큰 징계를 받은 교육부 고위 관료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비인간화의 늪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타인이나 타 집단을 개나 돼지로 여기는 게 왜 문제일까? 같은 인간임에도 누군가에게 개, 돼지 취급을 받는다면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같은 종인데 다른 종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존재론적으..

칼럼읽다 2022.02.15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진보다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진보다 김태일 장안대 총장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페이스북에 쓴 ‘여성가족부 폐지’ 때문에 주변이 시끄럽다. 정부 기구란 없앨 수도 있고 확대할 수도 있는 터라 그 정책 자체가 문제는 아닌 듯하다. 소란의 까닭은 말의 정치적 맥락 때문이다. 윤 후보는 이 말로 갈라치기를 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하여 특정 집단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기획이다. “페미니즘이 그렇게 혐오, 배제해야 할 대상인가? 성별 대결을 부추기는 것이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의 도리인가?” 며칠째 윤 후보에게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 후보는 페미니즘을 비틀어 분열을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걱정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 정도 문명국가가 되..

칼럼읽다 2022.02.15

가로수 가지치기

가로수 가지치기 최민영 논설위원 서울 마포대교 남단 윤중로의 가로수들이 과도한 가지치기로 기둥만 남은 1995년의 풍경. 최근 들어 이같은 행정편의적인 가지치기 관행에 대해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지치기는 해를 향해 무성히 뻗으려는 나무의 본능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길들이는 작업이다. 가지치기를 뜻하는 영어 ‘pruning’의 어원은 ‘둥글게 다듬어진’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rotundus’다. 농경만큼이나 오래됐다. 4500년 전 요르단의 올리브농장 유적에서는 나무를 다듬는 손바닥 크기의 돌칼이 발굴된 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포도나무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성장통으로 묘사한다. 나무는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에 낙엽 지고, 겨울에 휴면하는데 가지치기는 이때가 제철이..

칼럼읽다 2022.02.14

인간만이 지닌 능력 / 구본권

인간만이 지닌 능력 / 구본권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유럽에 알린 콜럼버스는 이후 10여년간 4차례 항로를 변경해가며 신대륙 탐험을 이어갔다. 콜럼버스의 배는 1503년 6월 마지막 항해 때 자메이카 해안에 좌초해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체류 기간이 해를 넘겨 길어지자 갈등이 생겨났다. 원주민들이 음식 지원 등을 끊자 콜럼버스는 당시 항해의 필수품인 천문 월력을 살핀 뒤 경고했다. “기독교의 신이 분노해 사흘 뒤 보름달을 없애버릴 것이다.” 예언대로 1504년 2월29일 밤 개기일식 현상을 목격한 원주민들은 혼비백산하고 넉달 뒤 스페인 구조선이 도달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언은 종교와 신화에서 주인공들이 힘과 권위를 갖는 가장 일반적인 경로다. 미개 사회에서 주술사의 권력과 지..

칼럼읽다 2022.02.11

위령비로 가는 길

위령비로 가는 길 황춘화 | 사회정책팀장 ‘성수대교 사고희생자 위령비(주차장)’. 차를 타고 성수대교 북단 강변북로 진입로를 지날 때면 파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자동차 전용도로 한가운데 위령비라니… 생각도 잠시, 차는 빠르게 강변북로로 들어선다. 언제 그런 생각이나 했냐는 듯 위령비도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곳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1일 공사 중이던 광주 아파트가 무너져내리고 실종자 발견 소식이 들리지 않는 지경이 되어서야 위령비가 떠올랐다. 지도 앱을 켰다. 앱은 서울숲을 지나 위령비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지도는 50m 앞 위령비를 가리키는데, 길은 철조망에 가로막혔다. 철조망을 따라 한참을 걸었지만 출입구는 없었다. 철조망 틈으로 두 갈래의 도로가 보였다. 차들이 빠..

칼럼읽다 2022.02.11

어른의 덕질

어른의 덕질 남경아 서울시50플러스재단 일자리사업본부장 두 달 전 유튜브 프리미엄 유료 서비스를 신청했다. 방탄소년단(BTS)의 음악과 영상에 집중하고 싶어서다. 고백하건대, 나는 요즘 BTS에 빠졌다. 우연히 작년 9월 BTS의 유엔총회 연설과 유엔회의장을 배경으로 한 ‘퍼미션 투 댄스’를 보았다. 그 자체로도 대단했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세대 간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기성세대가 ‘BTS 대단하네’라고 했다면, MZ세대는 ‘유엔 대단한걸?’이 압도적이었다. 무척 흥미로웠고 처음으로 그들이 궁금해졌다. ‘덕질’, ‘덕후’ 등 MZ세대에게 익숙한 이런 말들은 이제 대기업 신입사원 면접 질문으로도 등장했다. 세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분야와 장르 구별 없이 덕질이 일상화된 시대가 된 것 같다. 이런 현상..

칼럼읽다 2022.02.11

이름의 운명

이름의 운명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다. 발음이 안 좋거나 촌스럽게 느껴져서, 혹은 사주성명학을 근거로 운명을 바꿔 보려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여러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개명을 단행하는 분들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개명의 이유 중에 비교적 공감이 쉽게 가는 것은, 널리 알려진 흉악범과 이름이 같은 경우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명(名)이 따로 있지만 평상시에는 늘 자(字)로 불리던 시절, 조재우라는 인물은 성년이 되면서 회지(會之)라는 자를 받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다. 송나라 때 간신으로 유명한 진회의 자가 회지였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스물세 살의 젊은이로서 평생 간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조재우는 집..

칼럼읽다 2022.02.11

머리부터 발끝까지 ‘학교장 재량’이라니…학생인권은 어디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학교장 재량’이라니…학생인권은 어디에? 부산광역시의 한 사립 중학교 학생들은 최근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내려가는데도 종아리까지 덮는 롱패딩을 입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학칙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롱패딩은 지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또 다른 공립 직업계고에서는 머리카락 염색·파마는 물론 똥머리, 집게핀·고데기 사용까지 금지하고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와 부산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지난해 제보받은 학생인권 침해 사례 75건 가운데 일부다. 이들은 제보 내용을 추려 부산 시내 중·고교 25곳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과 자기결정권 등을 침해하고 있다며 지난해 10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진정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해당 학..

칼럼읽다 2022.02.11

당신이 야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당신이 야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구글에서 일하는 데이터과학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페이스북을 싹 뒤졌다. 메이저리그 야구팀에 ‘좋아요’를 누른 남성 팬들을 나이별로 분석했다. 같은 뉴욕 연고지인데도 양키스 팬이 메츠 팬보다 1.65 대 1로 더 많았는데 58세와 42세에서는 비율이 역전됐다. 볼티모어 팬은 1962년생이, 피츠버그 팬은 1963년생이 많았다. 다비도위츠가 연구한 모든 팀의 핵심 팬층은 팀이 우승한 해에 만 7~8세였다. 메츠는 1969년과 1986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그때 7~8세였던 소년들은 메츠가 ‘운명’이 됐다. 슬프게도 1986년 이후 양키스는 5번이나 우승했지만 메츠는 한 번도 없다. 2022년 40세가 된 한국 야구팬이라면 아마 LG 팬..

칼럼읽다 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