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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포롱포롱

글쓰기는 포롱포롱입력 : 2024.05.08 20:12 수정 : 2024.05.08. 20:29 성현아 문학평론가  이번주에는 담당하는 교양 강의에 특강 강사로 한 시인을 모셨다. 강의를 시작하며 시인은 한 편의 에세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누가 쓴 글 같아요?”라고 물었다. 사유도 문장도 아름다운 완성도 높은 글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아는 여러 작가를 떠올렸다. 친하다고 말했던 그 소설가의 글인가? 아니면 수필집을 펴낸 그 시인의 것일까? 학생들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글은 코미디언의 글입니다.” 나를 비롯해 강당에 앉은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방송에서 보아왔던 유쾌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진중함에 놀란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들 그 글을 전문 작가가 썼다고 추측했기 때문일 테다..

책이야기 2024.05.09

푸르름에 담긴 슬픈 이야기

푸르름에 담긴 슬픈 이야기입력 : 2024.05.07 20:18 수정 : 2024.05.07. 20:19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이다. 자연이 고마운 나날이다. 이렇게 고마움을 제공하는 신록의 뒷면에는 이런 슬픈 이야기도 숨어 있다고 한다. 로마의 이야기꾼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다. 어느 날, 아폴로는 다프네를 마주치게 된다. 황금 화살을 맞은 아폴로는 사랑의 화염으로 불타오른다. 납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을 피해 달아난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쪽에서는 좋은데, 저쪽에서 싫어하는 상황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할수록, 덤벼드는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고 도망치는 사람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는다. 아폴로는 손가락, 어깨, 하얀 팔에 감탄하고, 드러나지 않은 부분..

칼럼읽다 2024.05.08

모르는 단어를 기대합니다

모르는 단어를 기대합니다입력 : 2024.05.06 20:07 수정 : 2024.05.06. 20:09 심완선 SF평론가  창피한 기억이 있다. 내가 열 살 언저리였던 때, 어느 공터에 있는 트럭에서 ‘어름’을 팔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트럭 쪽으로 돌아가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어름은 틀렸어요. 얼음이라고 써야 맞아요.” 아저씨는 웃으면서 자기가 몰랐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 간질간질하고 뿌듯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했다. ‘어름’이 예전에는 맞는 표기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조금 겸허함을 배웠다. 어린이를 대하는 방법도 약간은 배운 듯하다. 이때 배운 겸허함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SF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되었다...

책이야기 2024.05.07

가랑비야!

가랑비야!입력 : 2024.05.01 21:37 수정 : 2024.05.01. 21:39 임의진 시인  이슬비, 보슬비, 가랑비가 촉촉해. 노랫말 속 가랑비를 아는가. 가수 양희은의 대표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김민기 곡 말고 김정신이 작사·작곡한 이 노래도 한때 방송 금지곡.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단 말인가. 가사가 부정적이고 퇴폐적이다.” 당시 금지 사유란다. 그저 실연당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는데. “가랑비야! 내 얼굴을 거세게 때려다오. 슬픈 내 눈물이 감춰질 수 있도록…” 쉬운 기타 코드 때문에, 통기타를 배우는 초짜들이 애창했던 노래. 봄비 내리고 이 노랠 부르다 보면 ‘아침이슬’까지 철야 밤샘을 하게 될지도 몰라. 양희은은 재수생 시절부터 명동의 YWCA ‘청개구리홀..

칼럼읽다 2024.05.06

바보야, 문제는 단지야! [크리틱]

바보야, 문제는 단지야! [크리틱]수정 2024-05-01 18:58 등록 2024-05-01 18:11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2024년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51.5%는 아파트에 거주한다. 아파트는 전 세계에 통용되는 적층식 공동주택방식이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단지식으로 개발됐다는 점이다(다른 나라는 공공도로에 면한 개별 건물식이 일반적이다). 아파트 단지는 1960~70년대 도시팽창기 급격히 유입되는 인구를 수용할 방책이 다급했지만, 인프라 구축을 위한 여력과 재정이 부족했던 주택 당국이 생각해 낸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자기 집값뿐 아니라 단지 내부의 도로, 공원, 놀이터, 편의시설 공사비와 유지관리비를 정부 대신 떠안은 구매자도 몇 년 있으면 올라있는 집값 때문에 ..

칼럼읽다 2024.05.05

나이 들면 친구를 정리해야 하는 이유

나이 들면 친구를 정리해야 하는 이유[수산봉수 제주살이] 소셜미디어 시대 새로운 만남 : 김판수, 염무웅, 백낙청24.05.04 19:28l최종 업데이트 24.05.04 19:31l 이봉수(hibongsoo)   ▲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현관 앞에서 김판수 공동이사장(왼쪽부터), 이봉수 기자, 염무웅 공동이사장, 김용락 시인, 박현희 운영위원, 백우인 시인.ⓒ 송경동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가 아니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명나라 학자 이탁오의 말인데, 현자들의 말은 젊은 시절에는 흘려듣다가 나이 들어 무릎을 치는 때가 있다. 그는 양명학자로서 신분차별에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등 유교적 질서를 거스르는 혁신사상을 펴다가 체포..

책이야기 2024.05.05

입술에 관한 몽상

입술에 관한 몽상입력 : 2024.05.02. 20:40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곡우 근처. 이즈음 물에 잠긴 논을 보면 올해 농사를 준비하는 설렘이 가득하다. 논두렁은 논과 논을 구획하는 경계이지만 또한 길고 좁은 밭뙈기이기도 하다. 옛날 모내기 끝내고 어머니는 그 자투리땅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호박이나 울콩을 심으셨지. 지난주 고향 가서 논두렁에 서서 술동이에서 막걸리 익어가듯 논바닥에서 뻐끔뻐끔 올라오는 기포를 보았다. 문득 들판의 논들을 아담하게 죄는 이 야무진 논두렁이 어째 꼭 얼굴의 입술 같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 하나가 흘러나오지 않겠는가. 입술, 인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야 손바닥보다 좁아도 만만한 장소가 결코 아닌 것.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퀴즈.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면 사..

칼럼읽다 2024.05.05

거짓말의 추억 [말글살이]

거짓말의 추억 [말글살이]수정 2024-05-02 18:44 등록 2024-05-02 14:30  나는 거짓말쟁이다. 선생이란 직업이 주는 허명에 속아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로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헛짚었다. 밤낮없는 거짓말! ‘사실과 다르게 꾸민 말’이라고 하지만, 먹물들의 거짓말은 성격이 다르다. 보통의 거짓말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벌어진 일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 걸 했다고 한다. 진위가 가려지면 비난과 처벌을 받거나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화끈하다. 물건을 훔치고도 안 훔쳤다고 말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비리를 저지르고도 그러지 않았다고 우기는 사람은 법적 처벌과 사회적 몰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러는 걸 테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은 얄궂다. 남들은 모르..

연재칼럼 2024.05.04

맛있게 퍼트린다

맛있게 퍼트린다입력 : 2024.05.02 20:36 수정 : 2024.05.02. 20:37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얼마전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작은 국숫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5평 남짓한 규모에 메뉴도 매우 단출해서 잔치국수와 멸치 칼국수가 전부였습니다. 유동인구도 많지 않은 이곳에서 과연 장사가 잘될까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뒤로하고, 우선 잔치국수 하나를 시켜보았습니다. 드디어 등장한 잔치국수는 잔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주 푸짐한 양입니다. 잔치국수의 핵심은 감칠맛 나는 시원한 국물입니다. 보통은 멸치, 다시마, 말린 표고버섯 등을 끓는 물에 우려내어 육수를 만드는데, 멸치에는 이노신산, 다시마에는 글루탐산, 표고버섯에는 구아닐산과 같은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

칼럼읽다 2024.05.04

얼 쇼리스가 가르쳐준 희망의 인문학 [세상읽기]

얼 쇼리스가 가르쳐준 희망의 인문학 [세상읽기]수정 2024-05-01 18:41 등록 2024-05-01 18:19  2006년 얼 쇼리스 선생 방한 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초청 세미나 모습. 왼쪽부터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 쇼리스 선생,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센터장인 임영인 대한성공회 신부, 필자 이병곤(당시 광명시평생학습원 원장). 광명시평생학습원 제공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노동한테 이겨먹기 위해/ 내가 제일 가엾다는 생각 하나로/ 누구 하나 미워할 필요 없이도//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날’(전욱진, ‘휴일’ 중에서) 유튜브에서는 ‘쇼츠’가 강자라 한다. 나의 대학원 강의 쇼츠는 시다. 늘 시를 앞세워 시작한다. ‘휴일’은 노동절에 맞춰 골랐다..

칼럼읽다 202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