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다이어트: 균형잡힌 삶의 지혜는 간데없고

닭털주 2022. 9. 18. 12:52

[김용석의 언어탐방] 다이어트: 균형잡힌 삶의 지혜는 간데없고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명언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한 몸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러한 노력을 대변하는 말이 다이어트(diet).

현대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상용어 가운데 그 빈도가 최상위를 차지하는 말이다.

국어사전은 우리말로 순화해서 식이요법으로 쓸 것을 권장한다.

그러나 우리 일상 현실에서 다이어트는 건강한 식이요법과는 거리가 멀다. ‘살 빼기라는 좁은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는 고대로부터 행해졌는데, 그때는 식이요법보다 더 넓은 의미로 쓰였다.

다이어트는 그리스어 디아이타(diaita)에서 유래한다. 디아이타는 체중 감량을 위한 음식 조절이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총체적 생활양식이라는 넓은 의미를 지녔다.

건강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

건강한 삶에는 몸의 건강만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 인간관계의 건강이 모두 포함된다.

물론 몸의 건강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도 달려 있다.

고대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음식마다 신체의 기능에 끼치는 영향이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다양한 음식 사이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균형을 위해서는 정도(程度)가 중요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파르마콘’(phármakon)이라는 한 단어로 약과 독을 모두 가리켰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정도의 차이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인간 삶의 여러 분야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정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일상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

디아이타의 개념으로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균형 있는 삶, 또는 삶의 균형 그 자체였다.

균형은 의학에서도 기본 개념이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의학자 알크마이온은 인간의 몸이 단순한 물리적 개체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봤다. 그 구성 요소들이 균형을 이룬 상태, 이소노미아라면 신체는 건강을 유지하지만, 어느 한가지 요소가 우세해서 한쪽이 지배하는 상태, 모나르키아가 되면 병이 난다고 했다.

이와 유사한 입장은 동양의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균형이 그 자체로 인간의 존재 조건임을 보여준다. 이소노미아와 모나르키아는 원래 정치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였는데, 이를 인간의 건강과 병리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 차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단어들은 현대 영어에서도 권리평등(isonomy)과 일인통치제(monarchy)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균형이 중요함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 로마의 명언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인용할 때, 그 의미의 추는 건강한 신체에 기울어져 있다.

건강한 신체가 우선이고 건강한 정신은 그에 따라온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융성기가 지나기 시작한 1세기 말~2세기 전반에 살았던 작가 유베날리스가 의도했던 것은 다른 뜻이었다.

그의 풍자시 제10편에 나오는 원문은 이렇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원해야 하리라.”

유베날리스는 로마의 미풍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고, 당시 세태는 그로 하여금 풍자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만들었다고 한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이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한쪽에 치우치는 현실을 돌아보라고 했다. 그리스의 디아이타가 원래 의도했던 것이 삶의 균형이었듯이 유베날리스는 로마 사람들이 그 균형감을 상실해가는 것을 풍자했다.

현대인의 문제도 균형감 상실에 있다.

삶의 균형을 강조했던 언어를 가져다 쓰면서도 그 균형을 파괴하는 데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파괴는 이중적이다. 끊임없이 살을 찌우며 끊임없이 살을 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나쳐 찐 살도 없는데 검질기게 빼려고 한다.

파괴적 다이어트를 하는 현대인은 자신의 몸에서 살을 철저히 소외시키려 한다.

생리학자들은 동물에게 체내 칼로리를 저장하려는 욕구는 성욕보다도 강력하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다이어트는 인간의 편협한 의지를 넘어서는 어렵고 복잡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다이어트에 대한 이런 비판과 경고음은 사실 별 소용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다이어트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당장 자연적 신체 리듬에 따라 왕성해지는 가을의 식욕과 풍성한 한가위 명절 음식을 심각히 걱정하고 있다. 다이어트라는 대낮의 유령이 우리 일상을 냉소하며 배회한다고나 할까.

우리는 그 유령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 일상이 그 유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이해관계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몸매에 대한 미적 감각과 너무 밀접하다. 세상을 미학적 판단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근대 초기부터 있었지만, 오늘날은 그것이 극단에 이른 느낌이다.

그럼에도 미력이나마 다이어트 문제의 핵심인 감각의 차원에서 일상을 성찰할 수 있는 화두를 하나 던져볼까 한다. 다이어트를 함으로써 미학적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지는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을 잃고 있는지는 무심하다.

시각은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감각적 수용성이 최고로 높은 감각이다.

신경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체 감각 수용기의 7할이 눈에 모여 있다. 청각은 그 수용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일상의 소음을 잘 참지 못하며, 물리적 마찰에 의한 자극적 소리에 청신경은 곧바로 손상을 입는다. 후각이 즐거이 맡을 수 있는 냄새도 한정적이다. 촉각은 미세한 접촉과 침입에도 즉각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도저히 볼 수 없어서 즉각 눈을 돌릴 정도의 대상은 의외로 적다. ‘추하다는 것은 보기 싫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각이 보기 싫어하는 것은 사실 매우 적다. 찰스 다윈이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고 움베르토 에코도 미학적으로 인정했듯이 그 자체로 추의 표명인 것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미와 추는 대구를 이루며 인식의 이원 구조를 형성하고 있지만 사실 비대칭적이다. 높은 감각적 수용성 덕에 인간의 시각은 아름다움을 찾아낼 능력이 있다.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길 능력도 있다. 그건 자연의 축복이다.

현대의 다이어트가 전형처럼 내세우는 신체미는 자연의 축복을 은폐하고 인간의 탁월한 능력을 억압한다. 다수와 시류가 고정관념화한 아름다움의 틀은 모나르키아, 곧 삶을 독점 지배하는 권력이 됐다. 그건 시각의 저주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름다움의 이소노미아, 곧 미학적 균형을 잃고 있다. 결국 균형 잡힌 삶의 지혜로서 디아이타도 상실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명언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한 몸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러한 노력을 대변하는 말이 다이어트(diet).

현대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상용어 가운데 그 빈도가 최상위를 차지하는 말이다.

국어사전은 우리말로 순화해서 식이요법으로 쓸 것을 권장한다.

그러나 우리 일상 현실에서 다이어트는 건강한 식이요법과는 거리가 멀다. ‘살 빼기라는 좁은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는 고대로부터 행해졌는데, 그때는 식이요법보다 더 넓은 의미로 쓰였다.

다이어트는 그리스어 디아이타(diaita)에서 유래한다. 디아이타는 체중 감량을 위한 음식 조절이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총체적 생활양식이라는 넓은 의미를 지녔다.

건강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

건강한 삶에는 몸의 건강만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 인간관계의 건강이 모두 포함된다.

물론 몸의 건강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도 달려 있다.

고대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음식마다 신체의 기능에 끼치는 영향이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다양한 음식 사이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균형을 위해서는 정도(程度)가 중요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파르마콘’(phármakon)이라는 한 단어로 약과 독을 모두 가리켰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정도의 차이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인간 삶의 여러 분야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정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일상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

디아이타의 개념으로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균형 있는 삶, 또는 삶의 균형 그 자체였다.

균형은 의학에서도 기본 개념이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의학자 알크마이온은 인간의 몸이 단순한 물리적 개체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봤다. 그 구성 요소들이 균형을 이룬 상태, 이소노미아라면 신체는 건강을 유지하지만, 어느 한가지 요소가 우세해서 한쪽이 지배하는 상태, 모나르키아가 되면 병이 난다고 했다.

이와 유사한 입장은 동양의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균형이 그 자체로 인간의 존재 조건임을 보여준다. 이소노미아와 모나르키아는 원래 정치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였는데, 이를 인간의 건강과 병리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 차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단어들은 현대 영어에서도 권리평등(isonomy)과 일인통치제(monarchy)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균형이 중요함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 로마의 명언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인용할 때, 그 의미의 추는 건강한 신체에 기울어져 있다.

건강한 신체가 우선이고 건강한 정신은 그에 따라온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융성기가 지나기 시작한 1세기 말~2세기 전반에 살았던 작가 유베날리스가 의도했던 것은 다른 뜻이었다.

그의 풍자시 제10편에 나오는 원문은 이렇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원해야 하리라.”

유베날리스는 로마의 미풍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고, 당시 세태는 그로 하여금 풍자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만들었다고 한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이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한쪽에 치우치는 현실을 돌아보라고 했다. 그리스의 디아이타가 원래 의도했던 것이 삶의 균형이었듯이 유베날리스는 로마 사람들이 그 균형감을 상실해가는 것을 풍자했다.

현대인의 문제도 균형감 상실에 있다.

삶의 균형을 강조했던 언어를 가져다 쓰면서도 그 균형을 파괴하는 데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파괴는 이중적이다. 끊임없이 살을 찌우며 끊임없이 살을 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나쳐 찐 살도 없는데 검질기게 빼려고 한다.

파괴적 다이어트를 하는 현대인은 자신의 몸에서 살을 철저히 소외시키려 한다.

생리학자들은 동물에게 체내 칼로리를 저장하려는 욕구는 성욕보다도 강력하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다이어트는 인간의 편협한 의지를 넘어서는 어렵고 복잡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다이어트에 대한 이런 비판과 경고음은 사실 별 소용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다이어트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당장 자연적 신체 리듬에 따라 왕성해지는 가을의 식욕과 풍성한 한가위 명절 음식을 심각히 걱정하고 있다. 다이어트라는 대낮의 유령이 우리 일상을 냉소하며 배회한다고나 할까.

우리는 그 유령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 일상이 그 유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이해관계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몸매에 대한 미적 감각과 너무 밀접하다. 세상을 미학적 판단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근대 초기부터 있었지만, 오늘날은 그것이 극단에 이른 느낌이다.

그럼에도 미력이나마 다이어트 문제의 핵심인 감각의 차원에서 일상을 성찰할 수 있는 화두를 하나 던져볼까 한다. 다이어트를 함으로써 미학적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지는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을 잃고 있는지는 무심하다.

시각은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감각적 수용성이 최고로 높은 감각이다.

신경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체 감각 수용기의 7할이 눈에 모여 있다. 청각은 그 수용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일상의 소음을 잘 참지 못하며, 물리적 마찰에 의한 자극적 소리에 청신경은 곧바로 손상을 입는다. 후각이 즐거이 맡을 수 있는 냄새도 한정적이다. 촉각은 미세한 접촉과 침입에도 즉각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도저히 볼 수 없어서 즉각 눈을 돌릴 정도의 대상은 의외로 적다. ‘추하다는 것은 보기 싫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각이 보기 싫어하는 것은 사실 매우 적다. 찰스 다윈이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고 움베르토 에코도 미학적으로 인정했듯이 그 자체로 추의 표명인 것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미와 추는 대구를 이루며 인식의 이원 구조를 형성하고 있지만 사실 비대칭적이다. 높은 감각적 수용성 덕에 인간의 시각은 아름다움을 찾아낼 능력이 있다.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길 능력도 있다. 그건 자연의 축복이다.

현대의 다이어트가 전형처럼 내세우는 신체미는 자연의 축복을 은폐하고 인간의 탁월한 능력을 억압한다. 다수와 시류가 고정관념화한 아름다움의 틀은 모나르키아, 곧 삶을 독점 지배하는 권력이 됐다. 그건 시각의 저주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름다움의 이소노미아, 곧 미학적 균형을 잃고 있다. 결국 균형 잡힌 삶의 지혜로서 디아이타도 상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