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405

제목들

제목들 수정 2025.07.03 21:19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젊은 날 체계적이지 못해 사방으로 흩어진 밥풀처럼 난삽하기 그지없는 세상 공부다. 밥은 먹으면 부르고 술은 마시면 취한다. 이건 명백한 부작용이다. 수불석권(手不釋卷)하라는 선친의 가르침이 있어 옆구리에 책은 하나 끼고 다녔다. 문지방이 닳도록 호프집을 드나들던 시절, 어느 날 헌책방에서 만난 네 글자가 뒤통수를 때렸다. 꿈꿀 권리>. 가스통 바슐라르. 저 높은 곳의 달. 그곳에 누가 있어 지구의 후줄근한 나를 본다면, ‘넌 왜 아직도 거기에 거꾸로 매달려 있니?’ 하고 추궁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는 서로가 서로를 정중하게 받드는 상대성의 세계. 여기에 중심은 없다.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모두가 중심이라서 굳이 중심은 없다는 것. 철석..

책이야기 2025.07.04

언어,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겐 그 자체로 ‘적’인 [.txt]

언어,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겐 그 자체로 ‘적’인 [.txt]신유진의 프랑스 문학 식탁 스위스 망명해 불어로 쓴 헝가리 작가 생존 위해 강제된 언어와 존재 건 싸움 짧고 단순하게…복종 대신 변형의 성취 수정 2025-05-03 10:41등록 2025-05-03 10:00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싸움은 ‘존재하기’였고, 그녀는 ‘문학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썼다’고 말했다. 사진은 헝가리 쾨세그에 있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무덤. 위키미디어 코먼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잘 알려진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어를 ‘적어’(敵語)라고 불렀다. 프랑스어에서 이 표현은 보통 ‘외국어’ 또는 ‘적대적인 언어’를 뜻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언어가 곧 장애물이자 위협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니..

책이야기 2025.06.29

시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수정 2025.06.26 21:45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논어는 시가 있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시(詩)는 아니고 시(時)다. 둥근 지구를 딛고 휘어진 공중에 기대 사는 동안, 시간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시(詩)도 시(時)다. 이 말은 한 구절 모자라서 단시(短詩)도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공자는 말(言)을 많이 다루었다. 시도 중요하게 여겼다. 아들에게 말한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단다(不學詩, 無以言).” 한자는 하나의 품사에 갇히지 않는다.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시공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명사도 실은 늙어가고 낡아가는 동사일 수밖에 없다. 시(時)는 시(詩)다. 모든 때는 반지 같은 한 편의 시를 남긴다. 굽이굽이 삶의 국면과 시는 도시락처럼..

책이야기 2025.06.28

시는 누구와 말하는가

시는 누구와 말하는가 수정 2025.06.25 21:29 인아영 문학평론가 나희덕의 시에서 자연은 한 번도 단순한 풍경이나 고정된 사물이었던 적이 없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인간과 감응하는 대상에 가깝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발표된 가능주의자>(문학동네, 2021)가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서 들리는 자연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였다면, 열 번째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이르러 시는 하나의 물질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시란 과연 어떤 물질일까. 시가 자연을 그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언어로 붙잡아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시집에서 자연이 명확하게 인지되거나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선 판단을 멈추고 감각에 집중해본다면 어떨까. 소리, 버섯, 장미, 유리, 산호초 같은..

책이야기 2025.06.27

여름은 너의 몫이라고

여름은 너의 몫이라고 수정 2025.06.19 21:01 최정화 소설가 그는 나를 알토라고 부르지만, 내 이름은 벅이다. 태어난 지 다섯 달쯤 지났을 때 나를 입양한 보호자가 지어준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그는 조그만 내가 귀엽다며 집으로 데려갔지만 희귀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길에 버렸다. 집 안에서 생활하는 데 길들여진 고양이가 길 위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춥다는 사실을 세 살에 처음 알았고, 길에서 태어난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적응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편이다. 나는 사시사철 감기에 걸려 있고, 털은 뭉쳐 있고, 귀에는 진드기가 가득하며, 뱃속에는 작은 비닐과 플라스틱 조각들이 들어 있다. 내게는 이빨이 없다. 구내염에 걸린 탓에 이를 모두 뽑..

책이야기 2025.06.24

“인간이 잠을 자듯이 종이책이 꼭 필요하죠”

“인간이 잠을 자듯이 종이책이 꼭 필요하죠”대만 출판그룹 다콰이문화 하오밍이 대표 인터뷰 부산 화교 출신으로 타이베이도서전 이사장도 겸임 서울도서전 참여하고 한국어로 쓴 ‘찬란한 불편’도 출간 “출판 위기 시대, 독자 취향 잘 맞추는 작은 출판사 유리”구둘래기자 수정 2025-06-17 19:32등록 2025-06-17 17:47 “올게(올해) 대만 출판인이 300명이나 오거든요.” 대만(타이완)에서 5일 서울에 도착한 하오밍이(69·郝明義) 출판그룹 다콰이문화(大塊文化·로커스) 대표는 부산 사투리가 역력하다. 부산 화교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치고 국립대만대학교로 유학 간 이후 대만에 정착했다. 매해 6월이면 베이징도서전이 열리지만, 그는 언제나 서울국제도서전행을 선택했다. 올해는 그에..

책이야기 2025.06.17

소설 클럽

소설 클럽 수정 2025.06.11 21:01 임의진 시인 인생이 통째 어그러져 산으로 가고 있는데, ‘어디 명산에 구경 가자, 가서 맛난 거 묵고 오자’ 꼬드김. 등산을 목적으로 만든 모임이 있다. 요상한 산악회 같은 건 아니고. 하나둘 뼈마디가 눌리고 쑤셔대서 이젠 해체 국면이야. 현주소지가 지목이 산으로 되어 있다. 멧산 말이야. 멧돼지도 살고 멧비둘기도 살아. 애당초 산에 사는데, 어디 다른 산엘 굳이 가고프겠는가. 결국 끌려가면 배낭에 기필코 시집이라도 넣어 간다. 초면이라도 물어보는 질문이 있어. “요즘 무슨 책 읽어요?” 대충 둘러대는 경우도 있지만 다행히 내 인연들은 우수한 편에 든다. 좋아하는 작가가 추천하는 책이라면 꼭 구입해서 정독한다. 이번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까. 지중해에 가면..

책이야기 2025.06.15

한창훈의 ‘지금, 이 문장’ [.txt]

한창훈의 ‘지금, 이 문장’ [.txt]수정 2025-05-23 13:05 등록 2025-05-23 13:00 197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된 박상륭 선생의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 두번째 문장이다.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읽어내기가 말 그대로 용이치 않았기 때문. 보기도 전에 두께에 이미 질렸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그러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이 소설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어떤 존재는 동녘 운산, 북녘 눈뫼, 서녘 비골 대신 갈증이 계속되는,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 모인다”는 첫 문장에 정신이 휘청거렸고 뒤에 나오는 이 문장에서는 완전히 영혼이 털려버렸다. 3인실에 있었고 내 옆 환자가 말기 암 노인이었는데, 툭하면 아들과 딸..

책이야기 2025.06.08

'문단에 등단을 했다' 이 말의 의미

20.09.15 17:12ㅣ최종 업데이트 20.09.15 17:20'문단에 등단을 했다' 이 말의 의미[시인에 대해 궁금하세요?] 문학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뜻주영헌(yhjoo) 문단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비슷한 질문으로 '어디에 소속되어 있나요'라는 말도 가끔 듣게 되죠. 소속에 관련한 질문도 문단과 비슷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런 질문에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등단=문단=시인'이라는 공식이 깨어져 버리니까요. '시인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는가?'는 질문도 받습니다. 이 질문은 등단이라는 것이 자격증처럼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등단'이라는 의미 먼저 등단이라는 제도를 알아보겠습니다. ..

책이야기 2025.06.06

긁혔네, 그래서 말인데

긁혔네, 그래서 말인데 수정 2025.06.01 20:47 김선경 교열부 선임기자 요즘 젊은 세대들은 누군가 기분 나쁜 말을 했을 때 ‘나 좀 긁혔어’나 ‘긁?’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쓴다. 마치 물리적으로 긁힌 듯 들리지만, 사실 이는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삐지거나 불쾌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단순히 신조어의 등장이라고 보기 쉽지만, 어쩌면 우리는 ‘긁다’라는 단어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곰곰이 살펴보면 ‘긁다’에는 ‘남의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자극하다’라는 뜻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다’라는 관용구처럼, 이는 단순히 피부를 긁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 의미도 담고 있었다. 결국 ‘긁히다’가 ‘삐지다’ ‘상처받다’처럼 쓰이는 것은 완전히 새..

책이야기 202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