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292

원초를 향해 나아가는 문학

원초를 향해 나아가는 문학입력 : 2024.05.22 20:48 수정 : 2024.05.22. 20:49 인아영 문학평론가  1920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생후 2개월에 브라질로 이민 간 여아가 있었다. 10대에 어머니를 잃고 가난한 이민자로 살았지만, 문학을 몹시 사랑했고 1943년 23세에 출간한 첫 소설 야생의 심장 가까이>로 포르투갈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이란 평을 들었다. 포르투갈어에 강한 애착이 있었지만, 이국적 이름 탓에 명성을 얻은 후에도 브라질에서 이민자 작가로 여겨졌다. 키 큰 금발에 화려한 외모로도 주목받았지만, 수줍음 많고 예민한 성향으로 세간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평생 브라질의 버지니아 울프라 불렸지만, 울프의 자살을 용서할 수 없다며 작가에게 주어진 ..

책이야기 2024.05.24

편집자가 눈에 선해지기까지

편집자가 눈에 선해지기까지입력 : 2024.05.19 20:35 수정 : 2024.05.19. 20:41 이슬아 작가  한창 책을 만드는 시기엔 꿈에 꼭 편집자가 등장한다. 꿈속에서 편집자는 휴양지로 도망친 나를 기어코 찾아내거나(도대체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별 수확이 없을 게 뻔한 나의 텃밭을 둘러보며 해결책을 강구하고(마냥 송구스럽다) 혹은 별말 없이 내 책상 근처에 앉아 그저 커피를 홀짝이곤 한다(이 경우가 가장 신경 쓰인다). 무의식에서도 편집자가 보일 만큼 출간 과정 내내 그를 의식하며 지내는 것이다. 문학 편집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글을 읽고 돌려주는 피드백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데뷔 전부터 나는 여러 편집자들 근처를 맴돌았다. 무수한 작가들의..

책이야기 2024.05.21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입력 : 2024.05.16 20:46 수정 : 2024.05.16. 20:50 김해자 시인   나는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는 중일 초 일 초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내일 보면 모르겠지 일년 후에도 모를 거야멀리서 돌아보면 나는 커져 있을 예정스멀스멀 징그럽게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너를 지우기 위해 말이지약한 자라 참고 있는 거 아니냐 하면맞아 난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식물성 힘을 갖게 될 거야 크게 자라신령하게 될 거야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될 거야기도하는 손들 점점 늘어술과 떡을 바치게 될 거야어느 날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알 바 있니 늘어나는 중인데 부푸는 중인데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시간을 뛰어넘어고요하게 날뛰는 중인데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 ..

책이야기 2024.05.17

같이 읽으면 즐겁지 아니한가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같이 읽으면 즐겁지 아니한가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부유할수록 책을 많이 읽고, 가난할수록 책에서 멀어진다. 공공도서관, 서점이 부족한 지방도 책에서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독서를 순전히 개인적 행위로 간주하고 책을 시장에 맡기면 이런 불평등을 교정할 길이 없다. 공공도서관과 지역서점을 포함한 독서생태계 형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수정 2024-05-14 19:37 등록 2024-05-14 19:15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사회학자  “밤 열두시에 문 닫는 거는 인자 고마하입시더. 그 시간에 누가 온다꼬.” 어머니는 애절했다. “안 돼요. 책방을 열어둬야 길이 환하지. 책 사는 학생들도 있고.” 아버지는 단호했다. “새벽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말이 됩니꺼? 사람 쫌 삽시더.” 책방 ..

책이야기 2024.05.15

은미(隱微)한 당신

은미(隱微)한 당신입력 : 2024.05.08 20:08 수정 : 2024.05.08. 20:10 고영직 문학평론가  “난 평이 니가 시를 쓰고 읽어줄 때가 너무 좋아. 그럴 때면 너한테서 막 빛이 난다. 반딧불 천 마리가 모인 것처럼. 네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맑아지고 힘이 나. 난 알아. 넌… 강한 아이야. 평아, 넌 꼬옥 훌륭한 시인이 될 거야.” 1980년대 ‘얼굴 없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시인 박노해의 첫 산문집 눈물꽃 소년>(2024)에 수록된 수필 ‘연필 깎는 소녀’의 한 대목을 읽다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근래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윤기 나는 물기가 있고, 뭉클한 감동이 있는 책이었다. 만약 당신이 어린 ‘평이’라면 마음이 어땠을까. 내 곁에서 나를 편들어주고 기꺼이 품어주..

책이야기 2024.05.11

글쓰기는 포롱포롱

글쓰기는 포롱포롱입력 : 2024.05.08 20:12 수정 : 2024.05.08. 20:29 성현아 문학평론가  이번주에는 담당하는 교양 강의에 특강 강사로 한 시인을 모셨다. 강의를 시작하며 시인은 한 편의 에세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누가 쓴 글 같아요?”라고 물었다. 사유도 문장도 아름다운 완성도 높은 글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아는 여러 작가를 떠올렸다. 친하다고 말했던 그 소설가의 글인가? 아니면 수필집을 펴낸 그 시인의 것일까? 학생들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글은 코미디언의 글입니다.” 나를 비롯해 강당에 앉은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방송에서 보아왔던 유쾌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진중함에 놀란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들 그 글을 전문 작가가 썼다고 추측했기 때문일 테다..

책이야기 2024.05.09

모르는 단어를 기대합니다

모르는 단어를 기대합니다입력 : 2024.05.06 20:07 수정 : 2024.05.06. 20:09 심완선 SF평론가  창피한 기억이 있다. 내가 열 살 언저리였던 때, 어느 공터에 있는 트럭에서 ‘어름’을 팔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트럭 쪽으로 돌아가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어름은 틀렸어요. 얼음이라고 써야 맞아요.” 아저씨는 웃으면서 자기가 몰랐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 간질간질하고 뿌듯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했다. ‘어름’이 예전에는 맞는 표기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조금 겸허함을 배웠다. 어린이를 대하는 방법도 약간은 배운 듯하다. 이때 배운 겸허함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SF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되었다...

책이야기 2024.05.07

나이 들면 친구를 정리해야 하는 이유

나이 들면 친구를 정리해야 하는 이유[수산봉수 제주살이] 소셜미디어 시대 새로운 만남 : 김판수, 염무웅, 백낙청24.05.04 19:28l최종 업데이트 24.05.04 19:31l 이봉수(hibongsoo)   ▲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현관 앞에서 김판수 공동이사장(왼쪽부터), 이봉수 기자, 염무웅 공동이사장, 김용락 시인, 박현희 운영위원, 백우인 시인.ⓒ 송경동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가 아니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명나라 학자 이탁오의 말인데, 현자들의 말은 젊은 시절에는 흘려듣다가 나이 들어 무릎을 치는 때가 있다. 그는 양명학자로서 신분차별에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등 유교적 질서를 거스르는 혁신사상을 펴다가 체포..

책이야기 2024.05.05

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

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고명섭의 카이로스 수정 2024-04-23 18:52등록 2024-04-23 15:56  창조적 영감이 누군가를 매개로 삼아 불꽃을 일으키면, 그 불꽃이 집단으로 번져 나가 거대한 불길이 된다. 기존 질서에 매여 있거나 그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은 불길을 끄려고 온갖 수단을 끌어오지만, 영감이 이끄는 집단의 불길은 우리를 묶어두고 있던 관습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사 여신들. 무사 여신은 문학·예술·학문의 창조 영역에 영감을 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는 소크라테스가 젊은 파이드로스에게 ‘광기’(mania)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광기를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몸의 질병’이고 ..

책이야기 2024.04.28

서정춘이라는 시인

서정춘이라는 시인입력 : 2024.04.25 20:56 수정 : 2024.04.25. 21:00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외출했다 돌아오니 책상에 흰 편지가 놓여 있다. 인정머리 하나 없는 인쇄체의 청구서 따위와는 확 비교되는, 정겨움이 폴폴 나는 시인의 손글씨였다. 봉투를 뜯으니 어느 신문의 서평 스크랩이 나왔다. 내가 식물에 관심이 많은 걸 알고 가끔 이렇게 챙겨주신다. 시인을 처음 소개해준 이가 전해준 남도 여행의 일화.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조금 일찍 수저를 놓고 시인은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다. 이 지역과 연결된 자잘한 화단의 근황부터 종내에는 큰 나뭇잎의 뒷꼭지까지를 요모조모 살핀다. 송아지의 귀를 살피듯 잎사귀의 털을 매만지면서 방금 놓은 숟가락과 잎은 왜 이리 닮았을까. 뭐, 그런 궁리도 하는..

책이야기 202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