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919

돌봄 살인

돌봄 살인입력 : 2024.05.19 20:40 수정 : 2024.05.19. 20:41 김만권 정치철학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지난 5월3일 대구지방법원 법정에서 예순이 넘은 아버지가 토로한 절규에 가까운 참회였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고통스러워했던 걸까? 아버지의 비공식적인 죄명은 ‘돌봄 살인’이었다. 아버지는 지적 장애가 있는 서른아홉 살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장에 섰다. 1984년 아이가 이 세상에 온 이후 아버지는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의 돌봄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자 시설에 맡기기도 했지만 10년 만에 뇌출혈로 쓰러..

칼럼읽다 2024.05.20

착한 사람이 지닌 힘

착한 사람이 지닌 힘입력 : 2024.05.14 20:21 수정 : 2024.05.14. 20:22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착하면 손해 본다’는 게 통념이다. ‘착하다’는 말이 자기주장 없이 남의 마음에 드는 행동만 한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면의 욕구를 무시한 채 부모의 기대에만 부합하려고 애쓰다 보면 성인이 되어 병리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더해져서, ‘착함’은 더 이상 추구할 덕목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어휘사 연구에 의하면, ‘질서정연한 모양이나 동작’을 가리키는 ‘착’이라는 만주어가 17세기 후반 우리말에 유입되어 ‘분명하고 바람직한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형태소로 쓰이기 시작했다. ‘착하다’는 18..

칼럼읽다 2024.05.19

비지의 열 번째 뜻

비지의 열 번째 뜻입력 : 2024.05.15 20:54 수정 : 2024.05.15. 20:55 오은 시인  어릴 때는 바쁜 사람이 멋져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TV에 자주 나왔는데, 목소리나 손동작에도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 출근하고 회의하고 종일 바쁘게 일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퇴근길 손에 들린 서류가방엔 비밀문서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조차 멋져 보였다. 영웅은 위기를 극복하며 더 강해지는 법이니까. 바쁜데도 여유를 잃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저 때를 떠올리면 아득하다. 직장을 퇴사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정장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류가방을 드는 대신 에코백을 메는 일이 많고 고민이..

칼럼읽다 2024.05.18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입력 : 2024.05.14. 20:24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단과대 리모델링 공사로 연구실을 옮기기 전까지 수년 동안 사용해왔던 공간은 문고리가 헐거워 문이 저절로 열릴 때가 많았다. 시설과 선생님께 말씀드려 몇 차례 손보았지만 여전했다. 그러니 주말이나 늦은 밤 학교에 남아 일할 때면 안쪽에서 문을 잠가두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잠그는 걸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클래식 FM을 켜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익’ 하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드니 닫아둔 문이 어느새 또 스르르 열려 있었다. 볼륨을 키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어폰 아닌 스피커를 사용했으니 복도에 얼마간 음악소리가 들렸을 테다.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둔 토요일 오후였고, 같은 층..

칼럼읽다 2024.05.16

감정 규칙

감정 규칙입력 : 2024.05.09. 20:28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어도어 대표이사 민희진의 기자회견이 연일 화제다. 성공한 여성이 격에 맞지 않게 ‘격앙, 눈물, 욕설’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며 비판한다. 자신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라는 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평정 유지는 대면적 상호작용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감정 덕목이다. 함께 있는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평정을 잃으면 당사자는 물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들조차도 당혹감에 빠진다. 민희진은 평정을 잃고 감정을 날것 그대로 공중에 드러냈다. 옆에 있던 변호사 두 명이 어쩔 줄 몰라하며 상황 수습에 급급하다. 사회학자 혹실드는 모든 상황엔 ‘감정 규칙’이 있다고 했다. 감..

칼럼읽다 2024.05.14

노인을 위한 집은 없다?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노인을 위한 집은 없다?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수정 2024-05-08 19:08 등록 2024-05-08 18:27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어디서 늙어갈 것인가’가 고령화된 우리 사회의 큰 관심사가 된 게 맞나보다. 교양 다큐나 시사 프로에서 간간이 나오던 소재가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했다. 십년 전만 해도 티브이 토크쇼에서 수다를 떨던 인기 연예인들이 다양한 실버타운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내일(10일)부터 방영된단다. 몇달 전 건설 붐이 일어난 고급 실버타운 이야기를 쓰면서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향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앞 동 뷰라고 해도 내 집에서 늙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게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집 앞에 화분을 잔뜩 키우며 해 질 녘 집 앞..

칼럼읽다 2024.05.12

아무도 ‘효’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아무도 ‘효’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입력 : 2024.05.07 20:18 수정 : 2024.05.07. 20:19 김택근 시인  “꽃을 드렸습니다. 불효자의 꽃을 받고도 어머니는 그저 웃습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자식은 머리로 이해할 뿐 가슴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시대가 어머니들을 버렸습니다. 아버지들은 먼저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어머니들은 쫓겨다닙니다. 시대의 난민들입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지아비 무덤과 고향을 지키다가 결국 새끼들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 집 작은 방에 갇혀있습니다. 밤마다 생각은 천리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온 마을, 앉으나 서나 정겨운 이웃, 손때 묻어 더 번쩍거렸던 장독대, 눈물마저 거름이 됐던..

칼럼읽다 2024.05.12

‘시혜’가 아닌 ‘지혜’가 필요한 때

‘시혜’가 아닌 ‘지혜’가 필요한 때입력 : 2024.05.08 20:06 수정 : 2024.05.08. 20:09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지난 4월 중순께 광주 광산구 가족센터에서 ‘장소와 환대의 인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마련된 8회 차 강좌 가운데 하나를 맡았다.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어떻게 입을 뗄지 망설이는 시간이 길었다. 이주민 대상 인문 강좌인데 청강생의 국적, 연령대는 물론 생활환경도 제각각인 데다 한국어 습득 능력에도 차이가 있어 통역자가 함께 자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호남대학교가 2022년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인문도시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월곡동 고려인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일을 도모하고 있다. 사업단은 지역사회에서..

칼럼읽다 2024.05.12

식당이 끝나면

식당이 끝나면입력 : 2024.05.09 20:23 수정 : 2024.05.09. 20:26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내가 지인과 함께 오래 운영하던 가게를 접었다. 구구한 변명은 의미없지만 밥장사, 술장사의 종말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이익에 대한 희망은 없고, 온갖 악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나온다. 내가 개인 모바일망에 영업 중단 소식을 알리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부끄럽지만, 밥동네에 이름이 알려진 너마저! 이런 분위기였다. 음식 팔던 가게를 철수할 때는 정리해야 할 게 산더미다. 관공서에 폐업신고해야 하고, 직원들 임금도 정산해야 한다. 당연히 퇴직금과 실업급여에 대한 청구권을 도모해야 한다. 이런 행정적인 절차가, 많이 간소화된 요즘..

칼럼읽다 2024.05.10

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

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입력 : 2024.05.09 20:24 수정 : 2024.05.09. 20:26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공중을 휘젓는 새는 수시로 머릿속으로 들었다가, 앉았다가, 날아간다. 새가 날면 나는 움푹 꺼진다. 나를 개구리처럼 우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아득히 멀어지는 새. 출구를 찾아 또 떠나는 그 새들에 관한 몇 개의 풍경. 오래전,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다. 병실의 한 환자가 자신은 새인데 잠시 인간으로 변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들은 척 아니하자, 의사와 간호사를 모이게 한 뒤, 멀뚱멀뚱 쳐다보는 가운데 창문을 드르륵 열고 푸드덕푸드덕 날아갔다고 한다. 영화 버드맨>은 근육질의 남자가 팬티만 걸친 채 벌새처럼 공중부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요란하고 복잡했다. 어쨌든..

칼럼읽다 2024.05.10